집필일
1999.03.16.
출처
서울포럼
분류
건축론

<A. agenda>
한국성이란 무엇인가? 현대 한국건축의 한국성이란 무엇인가?
해묵은, 정답 없는, 끊임없이 제기할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식민역사의 아픔, 분단국가의 현실 때문에 더하고
세계화 시대이기에 그 의문은 더해진다.
문화 사대주의, 문화 우월주의, 전통 콤플렉스의 덫에 빠지지 않고
세계 속의 한국성을 보다 세련되게 표현하는 건축이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유행적 명제가
과연 건축에 있어 유효한가?
(김진애, 서울포럼 대표)

<B. 본문>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가
지난 연말 국회의사당의 돔 지붕을 한식 기와지붕으로 바꾸려는 기도가 있었다. 국회건물이 상여를 닮았기 때문에 정치 파행의 한 원인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왜 하필 한옥 기와지붕인가. 한국적인 것은 만능의 해결사인가? 60년대의 중앙박물관 (현 민속박물관)부터 70년대의 정신문화연구원, 80년대의 독립기념관, 90년대의 청와대까지 국가적 기념물이 설 때마다 그 기준은 전통의 계승, 한식 기와지붕을 얹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때로는 민족문화의 중흥이라는 기치 아래, 때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구호 아래.
과연 한국적이면 세계적이 되는가? 짝사랑에 불과하다. 1993년 프랑스 예술계 인사들에게 한국의 현대건축을 소개할 자리가 있었다. 왜색시비로 사회문제화 됐던 부여박물관을 제시하며 제3세계의 전통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복고적인 건축을 했느냐는 시큰둥한 반응 뿐이었다. 당시 빠리 고등예술학교 교장은 이런 방법으로 과거에 매달린다면 세계화는 불가능하다고 충고까지 했다.
한국적 건축을 하자는데 반대할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단지 무엇이 한국적인 것의 내용이 문제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조급증과 강박관념은 열지어선 기둥들, 육중한 기와지붕, 또는 완자살창 등 피상적인 형태에만 집착케 됐다. 국회의사당의 거대한 열주는 종묘에서 볼 수 있는 한국적인 요소라고 강변된다. 좀더 세련된 세종문화회관 역시 피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적 전통은 곧 처마와 열주였다. 이 간단한 도식이 갖는 파워는 너무 막강했다. 음향도 해결 안되는 수준 이하의 공연장도 열주를 세우고 처마만 내밀면 전국의 문화회관 설계에서 당선되는 풍토가 되어왔다.

좋은 건축만이 전통을 만든다
왜 옛 중앙박물관이나 세종문화회관을 비판하는가? 그 건물들에는 절실한 현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기능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시민 문화를 무거운 돌집 속에 가두어 버렸다. 이 건물들이 모델로 삼았던 법주사나 종묘는 당시로서 시대적 사회적 필요를 해결한 최첨단의 건축이었다. 반면 20세기의 모작들은 시대를 거스르는 정신과 기술의 퇴행물일 뿐이다. 굳이 신라나 조선시대 것만 전통이 아니다. 서울의 가회동 한옥촌은 20세기 초부터 조성된 동네다. 김덕수의 사물놀이는 70년대에 만들어진 신음악이다. 그럼에도 가장 서울적이고 한국적인 것으로 내세운다. 현대의 창작도 전통이 될 수 있다는 증거들이다.
해방 이후 건축의 최대 유행은 수도권의 고층 아파트군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적인 면에서, 대중들의 호응도에서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다. 온돌을 깐 실내, 획일적인 배치, 고층화된 아파트는 세계에서 유일한 한국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적일 수는 있지만 전통은 되지 못한다. 여기에는 일상 생활에 대한 세심한 고려도, 공동체에 대한 철학도 없기 때문이다. 건축적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문화적 전통이란 유행만으로 창조되지 않는다. 새로운 전통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철저한 현재성과 완성도가 요구된다. 과거의 전통을 답습하는 것은 현재성이 없는 것이요, 새로움만 강조하는 습작들은 완성도가 없다. 다행히도 현재성과 완성도에 성공했던 건축들이 있다. 김수근의 공간사옥에는 거대한 열주도 기와지붕도 없지만, 아늑하고 연속적인 ‘한국적’ 공간이 재해석되어 나타났다. 김중업의 프랑스대사관은 추상적인 지붕의 형체만으로 한국적 조형을 얻어냈다. 아니, 이런 분석적인 내용을 몰라도 좋다. 이 두 건축물에 들어가면 예비 지식없이도 기분이 좋다. 아름답고 편안하다.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건축이기 때문에 새로운 전통을 만든 것이다.

창조적 정신이 세계화의 길
아예 솔직하게 기와지붕을 씌운 예는 차라리 낫다. 세계인들의 이국적 취미는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켰을 때, 말 그대로 양복 위에 갓 쓴 꼴이 된다. 91년 스페인 세비야 엑스포 한국관. 설계경기를 통해 당선되어 국제무대에 나간 건축이다. 굵은 철골 파이프 구조물 위에 천막을 쳐서 한옥 팔작지붕의 이미지를 상징화했다. 어찌보면 한국성과 세계화 사이에서, 전통과 현대화 사이에서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건축이었다. 그러나 세계인들은 이 애처러운 고민을 이해하지도 읽어주지도 않았다.
바로 옆에는 완벽히 전통적 건축을 되풀이한 태국관이 있었다. 태국관에는 관람객들이 호기심으로 북적댔지만, 어정쩡한 한국관에는 열명도 채 안되는 손님들만 기웃거릴 뿐이었다. 왜 그럴까? 세비야 한국관에는 질적 완성도도 현재성도 찾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건축가의 독창성, 보편적 수준의 창조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창조성 없는 건축보다는 차라리 태국관과 같은 복고적 전통을 더 높게 평가한다.
90년대 주목받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인 승효상은 일본의 한 건축포럼에서 강남의 작은 주택, 수졸당을 가지고 자신의 건축관을 설명한 적이 있다. 일본의 청중들은 승효상 건축에는 열주도 기와지붕도 없지만, 한국성이 물씬 풍기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건축이라 입을 모았다. 무엇보다 그의 정신적 견고함과 독창성, 그리고 실현된 건축의 질적 완성도에 감탄했다.
모짜르트는 보헤미아 민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미뉴에트 형식을 창조했다. 세계음악계는 보헤미아 민요에 관심이 있지 않고 미뉴에트에 감동한다. 세계는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세종문화회관과 독립기념관으로는 세계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63빌딩이나 포스코 사옥으로 도전할 수도 없다. 이런 정도의 건물들은 도쿄와 빠리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한국적 건축의 자원이 보편성과 완성도로 다시 창조될 때만 세계적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보헤미아의 민요가 아니라 모짜르트라는 창조력이다.
김 봉 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이미지 캡션
<사진1 -대표사진> 승효상의 학동 수졸당. 이 건축에 한국적 형태는 없다. 대신 절제되고 검약한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이 스며있다.
<사진2> 강봉진의 옛 국립중앙박물관 (현 민속박물관).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법주사 팔상전이 불국사 기단 위에 모여있다. 건축이 장소를 떠나면 생명을 잃는다.
<사진3> 엄덕문의 세종문화회관. 장엄한 열주와 두꺼운 처마는 문화를 관제화, 보수화시킨다.
<사진4> 김수근의 공간사옥. 잘게 분할된 공간들, 그러나 서로 연결되어 한국적 공간감을 느낀다.
<사진5>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 비록 현대건축의 어휘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추상적인 이미지가 포근하다.
<사진6> 세비야 엑스포 한국관. 어설픈 세계화가 실패하는 것은 기본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C: 박스글>
세계화: 우리만의 콤플렉스는 아니다
처음부터 세계적인 것은 없었다.
유럽 각국은 서로 베끼고 동경하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는 영국을, 러시아는 프랑스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상대 국가의 예술가들을 초청하는 것은 물론, 일부 계층들은 서로 대화할 때 일부러 외국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문화의 잡종교배 현상에 힘입어 결국 가장 먼저 문화적 세계화 클럽을 형성하였다.
지금 세계를 주도한다는 미국도 유럽을 베끼기에 정신이 없던 때가 있었다. 창조를 위한 모방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건물을 그대로 옮겨 짓다시피 한 예가 비일비재하다. 구대륙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은 20세기 초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천재 건축가의 출현을 필요로 했다. 그를 먼저 발견한 것은 유럽인들이었다. 그의 건축에서 유럽이 나아갈 방향을 보았고, 건축에서 시작된 미국적인 것의 세계화는 문화 전 분야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렇게 해서 바야흐로 세계 속의 새로운 ‘멤버’가 되었다.
일본도 고민과 파행을 많이 한 나라다. 지금도 ‘베끼기 선수’(‘copycat)라는 영어단어는 은근히 일본인들을 가리킬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건축가들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그룹이 되었다. 60년대 메타볼리즘의 선구였던 겐조 당께와 기쇼 구로까와, 80년대 가장 일본적인 건축으로 세계를 풍미했던 안도 타다오, 90년대의 전위 그룹을 이끄는 젊은 시게루 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건축은 신선하고 실험적이며 무엇보다 완성도가 높다. 콘크리트로 목조 건물을 흉내내는 것은 이미 일본이 60년대에 끝낸 일이었다. 관청이나 사회가 그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목하 고민중’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이들 나라들에서 전통과 역사는 아직까지 멍에이지 발판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어느 나라가 치고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사슬이었던 것은 날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황 두진 (건축가, TSK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