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 이황 – 대학자이자 대교육자
陶山書院은 慶尙北道 安東市 陶山面 土溪里, 洛東江邊에 자리 잡고있다.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退溪 李滉 (1501-1570)을 추천할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근본을 완성한 대학자였을 뿐 아니라, 360여명의 이름난 학자들을 키워낸 대교육자였다. 그를 奉享한 書院이 바로 陶山書院이며 모셔진 인물의 크기에 비례하듯, 현존 최대의 書院이며 최고의 품격을 지닌 書院이다.
이 書院의 모태는 退溪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건설한 陶山書堂이다. 陶山書院에서 북쪽으로 陶山을 넘어있는 兎溪洞 마을이 退溪의 고향이며, 1560년 낙향하여 지금의 자리에 ‘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퇴계 사후인 1574년, 書堂 뒤편에 陶山書院을 설립했고, 이듬해인 1575년에 賜額書院이 되었다.
退溪는 12세 때 숙부인 李堣에게 論語를 비롯한 기초 경전을 교육받은 후, 별다른 스승없이 독학으로 일관했다. 그의 능력에 비해 매우 늦은 나인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成均館 大司成 등 주로 연구교육직에 종사했다. 46세 때, 관직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淸凉山 기슭에 養眞菴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을 했다. 이후 줄곧 국가로부터 관직에 부임하기를 요청받았으나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임관하고 또 사직하기를 3차례나 되풀이했다. 60세에 완전히 물러나 陶山書堂을 짓고 안동 땅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70세 죽을 때까지 국가에서는 工曹判書 및 判中樞府使라는 고위 관직을 하사했지만, 모두 문서상 임명에 그쳤다. 그만큼 당대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가적 원로로 대우받았다.
그는 기존의 유학이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것에 치중된 경향을 비판하고, 학문이란 자기의 수양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爲己之學의 이념을 완성했다. 그의 일생은 그의 소신대로 출세에 급급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조선 선비들의 사표가 되었다. 그의 학문세계는 매우 깊고 폭이 넓어,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心性論, 정치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 經世論,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기 위한 格物論, 우주적 원리를 밝히는 太極說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의 모든 부분을 정리했다. 그 가운데 退溪學의 핵심은 ‘居敬窮理’을 추구하는 심성론이라 할 수 있다. 안으로 경건한 마음을 가지면서 아울러 객관적인 지식추구를 병행하는 것을 이상적인 학문방법으로 삼았고, 지식과 실천을 하나로 하는 知行合一을 주창했다. ‘敬’이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실현시키는 조건인데, 의식을 집중시켜 마음의 흐트러짐이 없이 매사에 몰두하는 것이고, 학문수양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했다.
이러한 심성수양론을 실현하는 과정은 당연히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退溪는 초기 書院보급 운동의 실질적인 주체였다.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정부에 건의하여 ‘紹修書院’을 최초의 賜額書院으로 승격시켰고, 그 스스로 伊山書院을 창건하기도 했다. 伊山書院의 학칙인 ‘伊山院規’를 제정했는데, 이후 書院 학칙의 모범으로 통용되었다. 제자들이 설립한 陶山書院 역시 이 학칙을 근본 정신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에는 “마땅히 內外, 本末, 輕重, 緩急의 차례를 알아서 스스로 격려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하라”는 中庸정신의 실천부터, “학생들은 항상 자신의 공부방에 조용히 앉아 오로지 독서에 정진하라”, “여자는 문에 들어올 수 없고, 술은 빚을 수 없으며, 형벌을 사용하지 못한다” 등까지 구체적인 실천항목도 제시되어 있다.
陽用三間의 陶山書堂
退溪는 자연감상과 건축을 취미로 삼은 듯하다. 31세 野人시절에 이미 芝山書舍를 세웠고, 46세에 고향에 養眞菴을 짓고, 살림집 설계도인 <屋舍圖>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단양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을 골라 ‘丹陽八景’을 명명하였고, 고향에 閑棲菴, 溪南書齋 등을 지었다가, 드디어 현 陶山書院 터에 자리를 잡아 陶山書堂을 지었다.
陶山書堂은 退溪가 직접 설계한 건물로 退溪의 소박하면서도 엄격한 건축적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 退溪는 멀리 외직에 있었고, 당시 공사를 책임진 승려인 法蓮에게 편지를 통해 건물의 설계를 지시했다. 書堂건물은 남향의 3칸 一자집으로 계획했다. 법련이 설계한 집은 工자형의 9칸으로 규모가 크고 복잡했다. 退溪는 ‘君子는 陽用三間이면 족하다’하여 부엌 방 마루 각 1칸씩 모두 3칸 一자집으로 만들기를 고집했다. 자신의 건축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아예 설계도까지 그려 보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집은 3칸이 아니라 4.5칸이다. 서쪽 부엌부분을 반칸 늘렸고, 동쪽에는 아예 한칸을 늘려 마루를 확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退溪는 이 집을 3칸으로 생각했다. 확장된 부분의 지붕은 모두 가적지붕(翼軒)을 달아서 3칸 본체의 맞배지붕에 매달린 꼴이다. 어디까지나 3칸이 임시로 확장된 것이지, 원래부터 영구한 4.5칸이 아니라는 강력한 표현이다. 늘어난 마루칸의 마루면도 통상적으로 꽉 짜인 마루가 아니라 듬성듬성하게 나무판을 설치하여 밑의 땅이 보이는 가설마루였다. 이 역시 임시적으로 설치했다는 표현이다. 필요한 기능은 다 수용하되 개념과 격식에는 어긋남이 없으려는, 退溪만이 가질 수 있는 실천적 관념의 표상이다.
그는 자기의 조그만 방안에 천 권의 책과 책상 하나, 화분 하나, 침구와 돗자리, 향로만 두어 독서와 사색에 몰두했고, 지금의 地球儀에 해당할 渾天儀를 두어 우주의 원리를 窮究했다. 뿐만 아니라, 마당의 동쪽 구석에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淨友塘이라 했고, 그 동쪽에는 蒙泉이라는 샘을 만들고, 샘 위 산기슭을 다듬어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節友社라 불렀다. 또한 뒤산인 陶山과 낙동강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택해 曲究巖, 天然臺 등 이름지어 자연 園林으로 삼았고, 일대를 소요하면서 명상하는 이상적인 講學생활을 영위했다. 이 집은 비록 작고 소박하지만 내포하고 있는 뜻은 이처럼 원대했다.
제자들이 기숙하면서 공부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書堂 서편에 籠雲精舍를 지었다. 이 집은 工자형으로 구성되어 상급반과 하급반이 절반씩 쓰도록 계획되었다. 각 반은 두 칸짜리 온돌방과 한 칸의 마루를 가지도록 되었는데, 두 마루가 서로 바라보도록 대칭적으로 구성되었다. 상하급반은 규모와 모양이 동일하지만, 上下 질서를 확보하도록 일정한 표식을 두었다. 상급반의 출입문은 2짝이고 창문도 2개인 반면, 하급반은 각 하나씩이다. 역시 실질적 쓰임과 성리학적 명분을 병행하려는 退溪 특유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국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을 수용하기에 농운정사는 너무 좁았다. 따라서 별도의 기숙사가 하나 더 필요해 건립한 것이, 書院 입구에 있는 亦樂齋였다. 이 건물은 너무 비좁은 陶山書堂의 형편을 딱히 여긴 학부모가 특별 기부로 지어준 기숙사다.
성공적인 확장 -陶山書院
退溪가 사망한 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 규모의 書院 설립을 시작한다. 陶山書堂 자리에 書院을 건축하기로 결정은 했으나 기왕의 書堂을 헐어버리고 새 書院을 지을 수는 없었다. 선생의 족적을 지우기에는 退溪는 너무 큰 스승이었으며, 陶山書堂은 이미 전국적인 명소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退溪의 書堂 영역을 보존한 채, 그 뒤편으로 書院을 증축하는 형식을 취하게 됐다. 따라서 陶山書院의 건축가들은 書堂 시절의 옛 구성을 살리면서, 書院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생기는 새 질서를 무리없이 수용해야 하는 건축적 난제에 직면하게 됐다.
그들이 발견한 방법은 陶山書堂과 농운정사 사이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한참 올라간 곳에 書院영역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길은 5단의 계단식 테라스를 꾸미고 한쪽은 농운정사의 담장으로 유도되는, 즉 한쪽은 수직적 벽이 상승하고 다른 한쪽은 수평적 테라스가 펼쳐지는 이원적으로 구성된 길이었다. 수직적 벽면들이 새로운 書院영역으로 방향을 유도한다면, 수평적 테라스들은 기존 陶山書堂 영역의 건물들로 유도하는 역할이다.
새 書院건축에는 크고 높은 문루가 존재하지 않는다. 書院영역 입구에 문루가 있었다면 전체적으로 시각적 중심이 될 것이고, 그러면 새 書院의 문루가 기존 陶山書堂 영역을 지배하는 것 같은 잘못을 범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스승인 退溪를 제자들이 위에서 굽어보는 불경을 범하지 않기 위한 배려로도 보인다.
退溪에 대한 조심스런 공경심은 강당의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강당인 典敎堂은 전면 4칸규모로 서쪽의 1칸 온돌방을 제외하곤 모두 대청마루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書院 강당 형식에서 동쪽에 있을 원장실을 생략한 모습이다. 동쪽 뒤로 돌면 바로 사당인 尙德祠가 나타난다. 원장실을 생략한 이유는 뒤쪽 상덕사에 모셔진 退溪가 영원히 정신적인 원장이라는 공경심의 은유적 표현이라 보인다.
陶山書院의 순수 書院영역은 중심의 강당 영역 – 뒤쪽 사당영역 – 동쪽 藏板閣 영역 -서쪽 上庫直舍 영역으로 구획된다. 강당 영역은 典敎堂 -東齋 -西齋로 둘러 싸인 마당이 중심이 되며, 마당 앞 좌우에는 작은 2층 다락집인 東西 光明室이 놓였다. 두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는 藏書閣의 역할이며, 陶山書院의 典籍을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광명실의 2층부 바깥에는 사방에 쪽마루를 내밀고 난간을 달았다. 마치 건물 주위를 순례할 수 있는 외부 복도같이. 유생들은 이곳을 잠깐 순회하면서 멀리 낙동강의 경관을 즐겼으리라. 그럼으로써 간이 누각의 역할도 대신한 건물이다.
사당 서쪽에 부속된 典祀廳의 모습도 특이하다. 2칸씩의 두 건물이 서로 마주 보면서 서있는 곳이다. 한 건물은 흙바닥 封堂과 마루방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건물은 마루방과 온돌방으로 구성됐다. 각 칸들이 특정한 의례를 수행했음직한 구성이다.
陶山書院에는 커다란 庫直舍가 두 채나 있다. 書院의 규모가 컸으므로 書院奴들도 많았다는 증거다. 전교당 서쪽에 있는 상고직사는 書院부분의 고직사고, 그 아래편 농운정사 뒤의 하고직사는 陶山書堂 영역에 속한 고직사다. 口자형의 상고직사는 제법 널찍한 마당을 중심으로 큰 곳간들로 이루어졌고, ㄷ자형의 하고직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앞에 놓인 工자형의 농운정사와 유사한 형태를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