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규범적인 형식과 통일적인 건물들
이제는 大邱廣域市에 속한 達城郡 龜知面은 洛東江으로 3면이 둘러 쌓인 半島와 같이 생긴 땅이다. 이 내륙 반도 북동쪽 끝, 道東里 35번지에 道東書院은 북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원래는 玄風邑 琵瑟山 기슭의 雙溪洞에서 1568년 창건되었다고 한다. 현풍의 비슬산은 일대의 명산으로서 크지 않으면서도 웅장하고, 동시에 손에 잡힐 듯 오묘하기도 한 산이다. 산 기슭에는 喩迦寺라는 대단히 뛰어난 사찰건축도 남아 있어서 “그 절에 그 산”임을 보여주고 있다.
현풍은 壬辰倭亂 당시 義兵將 郭再佑의 본거지로서, 사대부들의 반일 항쟁이 극심하던 곳이다. 또한, 현풍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이기도 했다. 따라서 1597년 서원이 전쟁의 참화로 불에 타 없어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 160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甫老洞書院으로 재창건되었다가 1607년 국가의 賜額을 받아 道東書院으로 승격되었다. 비슬산에서 이 궁벽한 강변 오지마을로 옮겨온 이유는 서원의 보호를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 서원의 뒷산인 戴尼山은 道東書院의 주인공인 金宏弼과 그의 선조들 묘소가 있는 瑞興金氏들의 선산이다. 또한 서원이 있는 도동마을 역시 金宏弼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氏族村이다. 도회지인 읍내를 피해서 후손들이 잘 관리할 수 있는 이 곳으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道東書院은 수많은 서원건축 가운데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인 곳으로 평가된다. 16세기에 세워진 병산서원이나 도산서원들이 비대칭적인 구성을 고집했다면, 17세기초의 道東書院은 중심축선 상에 누각 -대문 -강당 -내삼문 -사당을 배열하는 위계적 서열화를 이루었고, 그 좌우로 東齋와 西齋를 배치하는 정확한 좌우대칭 구성도 완성했다. 이러한 대칭적인 배치형식은 이후 서원의 전형적인 건축형식이 되어 대부분의 서원들에 차용되었다.
道東書院의 건물로는 강당인 中正堂, 기숙사인 居仁齋와 居義齋, 누각인 水月樓, 정문인 喚主門, 그리고 祠堂과 그에 딸린 제사시설 등 10여 동에 이른다. 이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朴工지붕집으로서, 같은 형태의 건물들을 규모로 달리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거대한 강당은 그 크기나 위치로 보아 당연히 팔작지붕을 올려야 할만한 집인데, 박공지붕을 한 것은 모종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땅을 다룬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대니산 기슭 경사지를 13개의 좁고 옆으로 긴 壇을 만들어 전체 敷地를 조성했고, 그 위에 건물들을 올렸다. 이 13단의 階段形 敷地들과 그 위에 올려진 단순한 형태의 朴工지붕집들은 서원 전체에 강렬한 조형적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통일적 조형들을 좁은 계단과 통로들이 중심축을 관통하면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道東書院의 제사시설에는 蒸飯所와 典祀廳, 그리고 牲壇과 坎이 있는데, 증반소는 제사 때 祭床에 올리는 밥을 짓고 器物을 보관하는 곳이고, 전사청은 제사용 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곳, 牲壇은 祭物인 犧牲을 올려놓고 品評하는 곳, 坎은 제사가 끝난 뒤 祭文을 태우는 곳이다. 道東書院에는 제사용 시설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그 이전의 서원들이 교육공간을 중시했다면, 道東書院은 제사공간을 더 중시한 기념적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건축형식이나 내용적으로 통일성과 기념성이 강한 것이 道東書院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고, 그 이유 중 하나를 서원에 모셔진 주인공의 강한 성품에서 찾을 수 있다.
金宏弼 -엄격한 道學者
道東書院은 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서원이다. 金宏弼은 ‘東方道學之宗’이라 불리우며 조선 유학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물로서, 道東書院이라는 명칭 역시 孔子의 道가 東쪽(朝鮮)으로 왔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보통 유학자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고 착실히 공부해서 입신출세하여 임금에게 충성하는 체제 순응형 모범생들이지만, 金宏弼은 이런 모범적인 삶과는 정반대의 파란만장한 삶을 산 풍운아였다.
그는 원래 서울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현풍으로 전 가족이 이사를 왔다. 이 지방은 외가가 있는 곳으로, 그의 부친은 관직생활이 여의치 않아 낙향해 처가에 의탁한 것이다. 원치않는 외가 더부살이는 자존심 강한 소년 金宏弼을 반항아로 키웠던 것 같다. 그의 일생을 기록한 神道碑에 “小時적에는 저자거리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이 정도 표현도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젊은 시절 공부는 멀리하고 호탕하게 놀기 좋아했던 생활을 묘사한 글이다.
이 망나니 청년이 마음을 잡은 결정적인 계기는 18세 때 박씨 부인과의 결혼이었다. 처가는 陜川郡 冶爐面에 있는 平壤府院君의 집안이었다. 거칠기는 하지만 비범한 자질이 잠재된 시골청년이 명문 가문에 발탁된 꼴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처가 근처에 寒喧堂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이때 인근 함양군수였던 金宗直(1431-1492)과의 만남과 배움은 그의 일생의 운명을 결정한 사건이었다. 김종직의 수제자가 됨으로써 鄭夢周 – 金宗直 – 金宏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맥과 사림파의 정통을 이어받는 영광을 누렸지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끝내 죽임을 당했다. 어쨌든 오랜 학문 연마를 마치고 26세 때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홍문관 등 주로 언론계통의 벼슬을 역임한 것도 전형적인 사림출신 관리의 길이었다. 바른 말을 잘하고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은 수 차례의 유배와 강등으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燕山朝 때의 戊午士禍로 최후를 마치게 된다.
士林들의 이상은 진리를 깨우치는 것 뿐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그 道를 실천하는 데 있었다. 金宏弼은 그의 이상을 집안에서 부터 실천하여 <家範>을 제정하였고, 이는 후대의 <家禮>로 이어진다. 친족은 물론 奴婢들에게도 長幼의 순서와 男女의 有別를 정하여 예절을 지키게 했다. 그는 생전에도 후학들의 존경을 받아 제자로서 趙光祖 金安國 成世昌 李長坤 등을 배출해 조선 사림의 본류를 이룰 수 있었다. 知行이 일치된 강직한 삶, 靑出於藍의 교육과 殉敎者로서의 최후 등은 사림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생애였다. 金宏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고, 사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칭송이었다. “선생은 비록 높은 지위를 얻어서 도를 행하지 못했고, 미처 책을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능히 한 세상 유림의 으뜸 스승이 되었고, (죽음으로써)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
성리학은 도학이라고도 한다. 단지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 뿐 아니라, 깨달음을 목숨을 걸고 실행하려 노력하는 것이 성리학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종직은 최초의 성리학적 순교자요, 도학자의 전형을 제시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함, 일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소명의식, 철저한 원리원칙의 고수……… 등이 조선조 선비정신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도 金宏弼의 삶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道東書院의 건축적 특징들은 곧바로 주인공 金宏弼의 성품을 건축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확한 중심축선의 강조, 전체 건물들의 형태적 통일성, 엄격한 좌우대칭 구조의 준수 등은 도학적 인격의 건축적 의인화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金宏弼의 성품이 도학자의 이상이 되었듯이, 道東書院의 엄격한 규범 역시 이후 서원건축의 강고한 규범이 되었다.
엄격함 속의 여유
어떤 사람이 완고한 도학자였다고 할지라도, 그 역시 기쁨에 웃고 슬픔에 눈물짓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어떤 건축물이 엄격한 규범을 따랐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생활을 수용할 여유는 있어야한다. 특히 숨막힐 것 같은 긴장 속에서 학업을 수행해야하는 서원 생활에 활력소가 되야 할 건축적 장치는 필수적이다.
우선 道東書院은 洛東江邊의 절경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누각에 오르면 가깝게는 유장한 낙동가의 흐름이, 멀리는 高靈平野의 광활함과 먼 산들의 율동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러한 경관을 늘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생들의 시선은 선생이 계시는 강당 쪽을 향하게 되고, 당당하고 엄격한 형태의 강당은 까다로운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 그러한 긴장 속에서 가끔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긴장을 해소시켜줄 자연 경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상의 긴장 속에 녹아있는 일탈이라고 할까?
이러한 건축적 일탈은 道東書院 곳곳에 숨어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대단한 기교와 정교한 정성으로 축조된 강당의 기단부분이다. 마치 조각보 공예작품과도 같이 평평한 돌들을 여러 조각으로 다듬어 정교하게 맞추었다. 부재들은 ㄱ자형, 한쪽 귀가 먹은 사각형, 가장 복잡한 형태로는 최대 9각형까지 가공되었고 평범한 사각형 부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단 위 부분에는 몇 개의 장식물을 조각하여 끼워 넣었다. 건물 전면 6개의 기둥 위치에 맞추어 용머리를 조각한 4개의 돌과 다람쥐를 조각한 한쌍의 판석을 끼워 넣었다. 기단 중앙에는 무엇인가 글자를 새기려고 준비한 것 같은 사각형의 미끈한 판석을 삽입했다. 기단의 위면은 넓적한 가공석을 덮었는데, 두 단으로 처리한 二重甲石의 기법을 보여준다. 강당의 측면에는 돌판으로 만든 한쌍의 퇴마루가 놓여있다. 소박함과 엄격함을 가치로 삼는 서원건축에서는 다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최고급의 구조물들이다.
서원의 정문은 喚主門이다.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는 의미의 이 문은 심각한 이름과는 달리 명문 서원의 정문이 되기에는 너무 작고 우스꽝스럽다. 좁은 전면 계단 폭에 맞추어진 듯, 한사람이 출입하기에 적합할 정도로 좁게 설정되어 있다. 문의 높이도 1.5m로 낮아 갓을 쓴 유생들은 머리를 숙여야 겨우 들어올 수 있을 정도다. 어쩌면 들어올 때부터 머리를 숙여 경건함을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네기둥으로 이루어진 한칸 문위에 사모지붕을 올렸다. 근엄한 맞배지붕들 속의 돌연변이와 같은 형태를 항아리 모양으로 만든 절병통으로 – 80년대 초에는 떡시루를 뒤집어 놓았었다 – 마무리했다. 문 구조물만으로는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재미있고, 도저히 이 근엄한 서원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강당 대청에서 보면, 환주문이 작고 뾰족한 형태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강당과 마당에서 전면으로 경관을 틔우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한 것 같다. 지형의 경사가 급함으로 담장을 높게 할 경우 앞의 낙동강을 가리게 되고, 낮게 할 경우는 너무 허한 인상을 갖게된다. 따라서 작으면서도 형태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문이 필요했다. 자체로서는 우스꽝스러운 환주문이 좌우의 담장과 앞산들과 중첩되어 그림 같은 경관을 만들어낼 때는 그 깊은 뜻과 고도의 감각에 입을 다물 수 없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건축요소는 서원의 도처에 깔려있는 돌 조각들이다. 砂巖 계통의 재질이어서 지금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환주문 계단부터 사당 앞까지 중심축을 따라 중요한 요소요소에서 발견되어 보는 이의 미소를 자아낸다. 환주문 앞 계단 소맷돌에는 돌짐승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사자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하다. 환주문 바로 앞 계단 위에는 꽃봉오리를 세워 머무름을 유도한다. 강당 앞 마당에 중앙에 반쯤 걸쳐져 놓인 포장석들은 동선의 연속성을 더욱 자극한다.
강당 기단의 장식은 이미 말한 바 있다. 4개의 용머리 중, 바깥쪽 것들은 여의주를 물었고 안쪽 것들은 물고기를 물었는데, 물린 물고기들은 빙긋이 웃고 있다. 한 쌍의 다람쥐 조각 중 한 마리는 올라가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고 있다. 사당 앞 계단 소맷돌에도 역시 한 쌍의 돌짐승이 놓여졌다. 봉황같기도 하고 오리같기도 하다. 계단에는 용머리가 삽입되고, 卍자문양과 꽃잎문양이 새겨지기도 했다. 근엄함과 간결함을 규범으로 하는 서원건축에는 매우 파격적인 장식들이다.
더욱 재미있는 현상은 이 조각들을 새긴 솜씨다. 용머리는 개머리 같고, 봉황은 오리로, 연꽃은 국화빵으로 되었다. 그만큼 조각의 사실적 솜씨가 떨어진다. 그렇다고 道東書院의 건축가와 기술자들의 솜씨가 저급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원 공사에 투여된 인원들은 전국에서도 내노라하는 최상급의 匠人들이었다. 강당 건물의 당당하고 정교한 결구법이나, 강당 기단의 조각보 수법의 돌쌓기만 보아도 그들의 정상급 솜씨를 알 수 있다. 단지 그들은 사실적 조각의 경험이 너무나 없었을 뿐이다. 불교가 탄압 받고 관념적인 유학의 시대가 되면서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예술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일절 장식을 배제하는 미니멀리즘적 예술관이 풍미하고, 사실성을 대신한 추상성이 지고의 미학이 된지 3세기가 넘다보니, 최상급의 장인들이라해도 사실적 조각에는 서투를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를 읽게된다.
또 하나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뒤에 있는 사당은 강당의 웅장함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경건한 건물이다. 기둥의 초석은 원형으로 다듬은 정평주초이며, 건물에는 귀솟음이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단청도 칠하여 소박한 강당과는 달리 상징성을 높이고 있다. 측면 상부에 들창이 있어 내부를 너무 어둡지 않도록 조절한다. 그런데 이처럼 경건한 건물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文人畵風의 山水畵인데 결코 名作이라고는 할 수 없는 솜씨다. <江心月一舟>와 <雪路長松>의 표제가 붙어있는데, 金宏弼이 사약을 받기 전 남긴 遺作詩에 나오는 구절이다. 도학을 위하여 죽음을 앞에 둔 그의 절개와 고독을 그린, 實景이 아니라 意景을 그린 道學圖이니 소나무가 진짜 같다든가 구도가 좋다든가 하는 그림적 평가는 무의미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