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北道 榮州市 順興面 內竹里에 있는 紹修書院(사적 55호)은 한국 최초로 설립된 私立大學이었다. 設立年度만 따진다면, 西歐 최초의 私立大인 美國 하바드大學보다 79년이 앞선 先進 高等敎育機關이다. 書院이란 儒學, 그 가운데서도 특히 性理學을 교육하는 학교지만, 현대식 대학과는 내용과 목적이 다르다. 紹修書院을 설립한 初期 性理學者 周世鵬(1495-1554)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는 마침 혹심한 饑饉이 順興地方을 휩쓸 때였고 주세붕은 이 고장의 郡守였다. 당연히 ‘하필이면 기근이 심할 때에 不要不急한 학교를 세우려 하는가’ 하는 반대 여론이 일었다. 주세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이유는 하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되 가르침이 없다면 부모는 부모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해서, 인간의 도리와 社會의 秩序가 무너지고, 세상의 모든 規範이 썩게되어 인간은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무릇 가르침은 반드시 先賢들을 尊崇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이에 사당을 세워 덕을 높이고, 書院을 세워 배움을 두텁게 한다. 진실로 가르침이란 세상의 어지러움을 수습하는 것이니,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 보다 시급하다.”
고 하여, 그 이유를 뚜렷이 밝혔다. 성리학의 가르침은 곧 社會秩序 維持를 목적으로 하는 實用的 指針이었고, 그 空間的 場所가 書院이었다. 또한, 교육의 근본을 尊賢, 즉 위대한 성리학자들에 대한 祭祀와 追慕에서 찾았기 때문에, 書院 안에 그들의 位牌와 影幀을 奉安하고 제사할 수 있도록 祠堂을 필수적으로 건축해야 했다. 따라서 書院 안에는 祠堂이라는 宗敎施設과 講學堂을 중심으로한 敎育施設이 함께 있어야 했다. 銅錢의 兩面과 같이 儒敎와 儒學을 분리할 수 없듯이, 書院도 종교시설인 동시에 교육시설이었다.
書院을 설립하려면 몇 가지 전제되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첫째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先賢을 모셔야했기 때문에, 위대한 性理學者가 태어났거나 활동했던 緣故地에 위치해야 하는 地理的 條件이 있었다. 順興 지방은 한국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최초의 성리학자 安珦(1243-1306)이 출생한 곳으로, 그를 모신 紹修書院이 위치하기에 딱 맞는 곳이다. 둘째, 私立大學으로 운영하기 위한 충분한 財源을 확보해야 했고, 당시 財源이란 土地와 奴婢였다. 紹修書院이 창설될 당시, 周世鵬은 隣近의 地方官들을 說得하여 漁場과 鹽田 등을 희사받았고, 官廳에서 관할하던 논밭 30結(약 24만평)과 이에 딸린 노비들을 기본 재산으로 확보했다. 셋째로, 敎育機關으로서 필수적인 藏書가 필요했는데, 주세붕 개인이 所藏했던 書冊 42종 500여 권을 藏書閣(圖書館)에 備置하여, 학생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한국 최초로 ‘白雲洞書院’이라는 이름의 書院으로 1542년 창설되었다.
白雲洞書院 시절에는 安珦에 대한 祭享行爲가 우선했던 것 같다. 安珦은 死後에 文成公을 追尊되었으므로 書院에 있는 그의 祠堂은 文成公廟라 지칭되었다. 文成公廟는 가장 중요한 位置에 자리잡았고, 最高級의 형식으로 建築되었다. 중국의 오래된 禮法 중에 서쪽을 최우선의 방향으로 정한 ‘西上’ 原理가 있었다. 文成公廟는 書院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아 西上의 原則을 따르고 있다. 반면, 교육공간인 講學堂은 사당의 동쪽에 놓여져 位置的 格이 떨어질 뿐 아니라, 정문에서 측면으로 돌아앉아 있어서 덜 중요한 건물임을 暗示한다. 당시 儒生들은 安珦 影幀을 參拜하기 위해 때때로 사당에 들렸다가 藏書閣에 보관된 책을 읽는 도서관 정도로 서원의 역할을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 서원에서 體系的인 敎育課程은 실시되지 않았다. 또한, 書院에 출입하는 儒生들은 대부분 科擧試驗을 준비하던 이들로서, ‘書院에 출입하면 4-5년 안에 有名人士가 되었고, 흔히들 科擧에 合格했다’고 전한다.
書院이 체계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한 것은 최고의 성리학자 退溪 李滉(1501-1517)의 업적이다. 李滉은 1549년 順興郡守로 부임하여 白雲洞書院을 본격적인 성리학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킬 목표를 세웠다. 그는 우선 書院을 國家公認機關으로 昇格시킬 노력을 기울였다. 國王이 직접 書院의 이름을 作名하여 그 懸板을 하사하는 公認過程을 ‘賜額’이라 했고, 공인된 書院을 賜額書院으로 불렀다. 賜額書院으로 승격되면 여러 가지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누리게 된다. 우선, 書院에 딸린 土地에 대해 稅金이 면제되며, 書院에 속한 奴婢들을 國家的 使役으로부터 해방된다. 또한, 국가에서 발간하는 귀중한 書冊들을 공급받는 학문적 특혜도 누리게 된다. 드디어 1550년, 白雲洞書院은 賜額을 받아 ‘紹修書院’으로 거듭나면서, 한국 최초의 書院이자, 동시에 최초의 賜額書院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李滉은 이러한 국가적 지원을 바탕으로 以前과는 전혀 새로운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이전의 書院이 科擧 준비에 치중했다면, 李滉은 科擧試驗 준비를 금지시켰다. 오히려 科擧合格者만을 院生으로 받아들여, 一切 世俗的 목적에서 벗어나 학문을 통해 자신을 修養하고 가르침을 實踐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書院의 교육방법은 독특해서, 선생이 지정해 준 내용을 스스로 읽고 깨우친 다음, 선생과 토론을 통해 깨우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일방적인 注入式 講義가 아니라, 討論과 세미나 위주의 교육이었고, 선생은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들의 익숙한 지도자였으며 토론 상대였다. 院生들은 書院 내에서 寄宿하면서 정기적인 祭享儀式을 통해 유교적 신앙심을 고취시켰고, 매일 스승에 대한 禮儀凡節을 실천했다. 講學과 祭享은 書院 교육의 2대 핵심과정이었는데, 紹修書院 뒤에 마련된 史料展示館에 再現된 디오라마 전시물에서 이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제 紹修書院은 高等考試 준비기관에서 벗어나 순수한 性理學의 殿堂으로 탈바꿈했다.
1550년에 시작하여 1888년 마지막 입학생을 받을 때까지 340여 년간 4,000여명의 인재들이 紹修書院을 졸업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李滉의 學風을 이어받아 이른바 ‘嶺南學派’의 主流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이 한국의 知性界와 政治界를 주도하면서 紹修書院은 최초의 서원이자 최고의 명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紹修書院의 성공사례가 전국에 알려지자 各地에서 대대적인 書院 설립 붐이 일어났는데, 전성기에는 전국에 580여개의 書院이 운영될 정도로 번창했었다. 李滉은 자세한 교육의 지침과 院生들이 지켜야할 규칙들을 제정했는데, 큰 스승이 정한 院規는 대부분의 書院이 채택하여 書院 운영의 교과서가 되었다. 한국 書院運動의 始祖는 바로 李滉이라 할 수 있다.
李滉이 정한 書院 교육지침은 매우 엄격했다. 정신은 항상 깨어있어야 했고, 衣裳과 몸가짐은 조심스러워야 했으며, 스승과 상급생에 대해 깍듯한 禮遇를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항상 글을 읽고 생각해야 했다. 이러한 자세를 李滉은 ‘敬’이라 불렀고, 書院은 가히 ‘敬의 空間’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성리학의 戰士들을 교육하는 士官學校와도 같았다. 그러나 인간은 긴장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緊張을 풀고 자유로운 휴식을 취해야 緊張의 强度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피로하여 학습 효율을 높일 수 없게 된다. 書院의 교육자들은 이 점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대개 書院은 人家에서 떨어진 곳, 주변 경치가 매우 좋은 곳에 자리잡았다. 세속적인 雜念을 떨치고, 자연이라는 거대한 休息處를 제공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紹修書院은 竹溪川이 휘돌아 흐르는 川邊, 울창한 숲 속 平地에 자리잡았다. 紹修書院 주변의 숲은 學者樹라 부르는데, 멀리서도 그 울창함과 신성함이 눈에 띄기 때문에 뭔가 숲속에는 특별한 곳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원래 이곳은 宿水寺라는 큰 절이 있었던 터였다. 그 흔적은 곳곳에서 나타나는 데, 우선 書院 입구에는 높이 3.8m의 잘 생긴 幢竿支柱 (寶物59號) 한 쌍이 남아있다. 書院 건물의 礎石들 가운데 잘 다듬어진 것은 대개 宿水寺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며, 여기 저기서 佛像이나 寺刹建物의 礎石들이 發掘되었다. 宿水寺는 8세기경 創建되어 16세기 초에 廢寺된 것으로 추정된다. 書院이 건립될 당시에는 이미 주춧돌만 남은 廢墟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불교를 철저히 배격했다. 극히 현실지향적인 유학과 탈속적인 불교는 사상적으로 정반대라 할 정도로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배타성은 정신세계에만 국한된다. 이왕에 존재하는 물질적 환경을 배척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이 비록 불교에서 사용하던 것이라해도, 물질에는 아무런 종교성이 없다. 최초의 書院이자 유교의 殿堂인 紹修書院에 버젓이 幢竿支柱 등 불교적 상징들이 수용될 수 있었던 根據였다. 초기 성리학자들이 가졌던 사상적 柔軟性과 實用的 世界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書院 正門 바로 바깥에는 ‘景濂亭’이라는 亭子가 川邊에 서 있다. 엄격한 書院 경내공간을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일종의 學生會館 역할을 했던 곳이다. 사방으로 일절 벽체가 없이 기둥으로만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겉모습은 결코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자 안에 앉아 바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유려한 개천의 흐름이 정자 안으로 들어오고, 건너편 고적한 숲은 손에 닿을 듯하다. 이런 종류의 건물은 안에 들어와 앉아보아야 한다. 겉보다는 속을 重視했던 성리학자들의 실용적 세계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景濂亭 건너편에는 흙을 돋아 만든 정사각형의 작은 壇이 있다. 이 壇의 용도는 특수하다. 書院에서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주요 祭物로 돼지나 염소 등 산 짐승을 잡아야되는 데, 그 제물을 ‘犧牲’이라 한다. 제사 전날 저녁, 祭官들은 犧牲을 이 土壇 위에 올려놓고 品評을 하게되며, 품평에서 통과되어야 제물로 올려지게 된다. 이런 용도로 쓰는 壇을 省牲壇이라 부르는데, 대개 돌을 쌓아 만들며, 紹修書院과 같이 土壇으로 된 예는 극히 드물다.
최초의 書院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생각하지 않으면 紹修書院의 건축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書院들은 일정한 건축적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紹修書院에서는 특정한 형식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얼핏보면 일정한 틀없이 자유분방하게 건물들이 앉혀져 있어서, 엄격한 예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건축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처음으로 書院 건축을 시도하면서 아직 특정한 典範을 만들지 못했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紹修書院은 원래 祠堂 중심의 祭享書院으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講堂 중심의 講學書院으로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書院의 중심건물이라 할 수 있는 講學堂은 정문에서 90°돌아 앉았다. 즉, 正門에 들어오면 강학당의 측면이 보이게 되어있다. 講學堂은 규모가 비교적 크고 丹靑도 칠해져 있어 눈에 잘 띄는 건물이지만, 일부러 자태를 감추어 위압감을 덜고 있다. 그 뒤로는 3棟의 건물들이 놓여져 있다. 이들은 모두 宿所建物이며 서로 다른 특색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긴 숙소에는 日新齋와 直方齋라는 懸板이 좌우로 걸려있다. 실상 이 건물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건물이 연립한 형식으로 보아야 한다. 이 곳은 院生들의 寄宿舍로서 두 건물이 완전 좌우 대칭으로 붙어있는 일종의 聯立住宅인 셈이다. 후에 설립된 다른 書院들에서는 두 기숙사는 완전 분리되어 東齋와 西齋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세워지게 된다.
學求齋라는 3칸 건물은 2개의 방과 그 사이에 앞뒤로 툭 터진 마루가 놓여진 3칸 건물이다. 이 건물은 童蒙齋라고도 불리웠는데, 이름에서 추측하듯이 어린 학생들에게 초보적인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일종의 豫備學敎였던 셈이다. 그 바로 옆, 川邊 쪽의 건물이 至樂齋다. ‘天下英材들을 모아 가르치니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論語의 유명한 구절을 聯想케 하는 이름이다. 이름으로 보면 이 건물은 분명 선생들이 사용하던 곳이 분명하다. 3칸 건물이지만 2칸이 마루로 터져있고, 1칸만 작은 온돌방이다. 건물 바닥은 거의 지면에 닿아있고, 건물의 높이도 낮다. 겉으로만 본다면 書院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건물이다. 그러나 가장 높은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있을 수록 호화롭고 큰 집에 살아야하는 현대의 建築位階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리학적 세계에서는 높아질수록 겸손하고 검소한 것이 최고의 美德이었다. 어쩌면 그 좁고 낮은 곳에서만이 크고 높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번화하고 호사스러운 곳에서 자기 자신의 깊고 아늑한 內面을 省察할 수 있겠는가?
最初 最高의 名門이라는 紹修書院의 건축은 겉보기에 무질서하고 간결하며 초라하다. 애초에 書院의 건설자들은 겉보기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건축 속에 담겨질 내용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至極한 儉約의 공간들을 이해하려면 ‘겉보기’ 보다는 ‘속보기’에 밝아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