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氣論과 主理論의 전개와 서원
조선시대 500년을 지배한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요, 철학 사상의 근본지식은 바로 性理學이었다. 儒家의 창시자인 孔子의 주된 목표는 仁義禮智와 같은 인간적인 가치들이 존중되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었고, 자연히 학문적 관심도 현실에서 실천해야할 윤리학적 규범에 치중되었다. 반면 西域에서 유입된 불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제시하였고, 유가의 반대편에서 성장한 道家는 자연과 우주의 운동에 대한 우주론적 논리를 설파했다. 이러한 다른 사상의 위협 속에서, 동양사회를 주도해야할 유가의 입장에서는 실천적 윤리 뿐 아니라 그이 사상적 철학적 토대가 될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요구를 완벽하게 해결한 이는 바로 중국 宋나라의 朱熹였다. 그는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부터 자연과 우주의 변화원리까지 일관하여 꿰뚫는 보편이론을 정립했고, 현실의 모든 분야에 그 원리를 적용했다. 조선시대 500년간, 性理學이 지식층의 주도적인 사상적 기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朱熹의 이론이 너무나 완벽했고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의 핵심적 개념은 ‘理’와 ‘氣’다. 세상의 만물을 움직여나가는 변화는 ‘理’와 ‘氣’의 작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 쉽게 설명하면, 자동차를 움직이려면 우선 엔진과 부속품들이 작동원리에 따라 설계되어야 하지만, 연료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동차 엔진의 작동원리를 ‘理’라 한다면, 여기에 주입되는 연료를 ‘氣’라고 할 수 있다.
朱熹가 설정한 ‘理氣論’은 후세 학자들의 세계관적 쟁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현상을 궁리하는 방향에 따라, ‘理’와 ‘氣’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도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性理學계는 크게 두 파로 나뉜다. ‘理’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는 이들은 주로 경상도 일대를 기반으로 한 학자들이어서 ‘嶺南學派’ 또는 ‘主理派’라고 불리우고, ‘氣’의 우월성을 신봉하는 이들은 경기도 충청도에 기반을 두어 ‘畿湖學派’ 또는 ‘主氣派’라 불리웠다. 상대적으로, 主理派는 性理學의 근본적인 원리와 철학에 비중을 두었던 반면, 主氣派는 현실적인 적용과 사회체제의 운용에 비중을 두었다. 조선후기에 치열하게 전개된 당파들의 갈등에서도, 主理派는 南人과 北人계열이 주를 이루었다면, 主氣派는 西人에 뿌리를 둔 老論과 少論의 핵심이 되었다. 性理學계가 主理派와 主氣派로 양분되었다면, 당연히 그들의 장소적 기반이었던 서원건축도 서로 뭔가 차이가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老論의 遯巖書院과 少論의 魯岡書院
지금까지 소개된 경상도쪽의 서원들이 모두 主理派에 속하는 서원이라면, 이번의 遯巖書院과 魯岡書院은 主氣派들의 핵심적인 서원이다. 옛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서원들은 대략 20여개소 되지만, 그들 대부분은 경상도에 밀집된 主理派들의 서원이다. 主氣派 서원은 遯巖, 魯岡, 武城, 筆巖書院 정도로 유례가 적다. 그렇다고 主氣派들이 主理派에 비해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이 작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18세기 이후의 조선 정계는 철저하게 主氣派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영남의 主理派들은 향리에 은거했던 재야지식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연히 主氣派들의 서원이 더 성행했었지만, 역설적으로 훨씬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극히 소수만 남겨지게 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했을 당시, 우선적으로 철거한 것은 바로 당시 정계를 장악했던 主氣派들의 서원이었다. 특히 노론계열은 흥선대원군의 최대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노론 최대의 서원이었던 華陽洞書院이 가장 먼저 철거될 만큼, 主氣派들의 서원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主氣派 계열의 性理學을 완성한 사람은 栗谷 李珥다. 이이의 수제자인 金長生은 이이의 주기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현실생활의 규범들을 정립하여, 이른바 <예학>을 완성하게 된다. 金長生의 학문은 아들인 金集에게 전수되었고, 金集의 양대 제자인 宋浚吉과 宋時烈은 활발한 정치활동을 통해 主氣派 지식인들을 서인이라는 붕당으로 정치세력화 시켰다. 宋時烈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리로 여겨질 정도로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권위있는 정치인이었다. 性理學에 대한 해석이 그가 생각하는 정통을 벗어나면 가차없이 비판을 가했고, 비판받은 이는 사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관직까지 박탈당할 정도였다.
아무리 최고의 학자요 정치인이라해도 이러한 독선적인 권위주의는 반대세력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 宋時烈에 대한 최대 반대파는 아이러니하게도 宋時烈의 수제자였던 尹拯이었다. 尹拯을 필두로 한 젊은 주기론 학자들은 宋時烈의 완고한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한 해석을 주장하면서, 당쟁을 타파하고 대통합의 정치를 역설했다. 尹拯이 스승인 宋時烈과 결별한 것을 계기로 主氣派 또는 西人 黨派가 둘로 분열되었고, 宋時烈의 보수파를 老論, 尹拯의 진보파를 少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인 그룹을 이끌었던 세 가문은 金長生-金集의 光山 金씨, 宋浚吉-宋時烈의 恩津 宋씨, 尹拯의 파평 윤씨였다. 이 세 가문은 공교롭게도 지금의 논산 일대에 인접해 살았는데, 광산 김씨는 連山(現 논산市), 은진 송씨는 懷德(現 대전시), 파평 윤씨는 尼山(現 논산시)에 자리잡고 살았다.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학맥을 가졌던 이들은 서로 돕고 가르치던 사이였지만, 宋時烈과 尹拯의 결별 이후, 김씨와 송씨 가문은 老論에, 윤씨 가문은 少論에 속하면서 서로 갈등하게 되었다.
遯巖書院과 魯岡書院은 행정구역상으로 모두 논산시에 속해 있고, 거리로는 20여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遯巖書院은 노론을 대표하는 서원이고, 魯岡書院은 소론을 대표한다. 두 서원은 건축적으로 서로 닮은 점이 많지만, 당파적으로는 가장 대립적인 위치에 놓인 묘한 인연을 맺고 있다. 현재의 모습도 대조적이다. 遯巖書院은 매우 큰 규모의 서원이었지만 잦은 이건 때문에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던 魯岡書院은 오히려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서, 두 서원을 비교하면서 살펴보아야만 主氣派 서원건축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다.
禮學의 실천 -遯巖書院
충청남도 論山市 連山면 林리에 있으며 사적 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1634년 沙溪 金長生(1548-1631)을 配享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1659년 국가의 인정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후에 愼獨齋 金集(1574-1656), 同春堂 宋浚吉(1606-1672), 尤庵 宋時烈(1607-1689) 등, 노론파의 영수들을 배향하여 노론 최고의 서원이 되었다. 이들 4사람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18명의 학자로 꼽혀 文廟에 모셔졌고, 遯巖書院도 아울러 先正書院이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金長生과 金集은 부자관계, 宋浚吉과 宋時烈은 8촌 관계로서 두 가문의 연합서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서북쪽 2km 떨어진 下林里 숲말에 자리 잡았다. 숲말은 金長生과 金集이 살았던 광산 김씨 가문의 世居地였고, 서원 뒷산에 遯巖이라는 바위가 있어서 서원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원래 서원터는 낮은 평지, 하천가에 자리잡아 잦은 수해를 입었는데, 1880년에는 급기야 현재 위치로 移建하게 되었다. 이 때는 이미 서원의 교육적 정치적 기능이 소멸되었던 시대로서 이건 공사에 필요한 충분한 재원을 조달하기 어려웠다. 모든 건물을 옮겨가지 못하고, 서원의 가장 큰 강당이었던 凝道堂은 원래의 위치에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옮겨진 서원은 사당 중심의 불구적 형태를 갖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작은 강당건물을 사당 앞에 세워서 임시방편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1세기가 지난 1972년에야 凝道堂을 옮겨올 수 있었지만, 사당 앞의 원위치에는 이미 다른 강당건물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동떨어진 위치에 뎅그라니 놓여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금의 遯巖書院은 전체적으로 크게 변형된 모습이기 때문에 전체 배치공간의 미학을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당인 凝道堂의 위풍당당한 모습에서는 조선 정계를 주도했던 노론파의 정치적 위세를 읽을 수 있고, 사당인 唯敬祠 일곽의 엄숙하고 단정한 분위기에서 畿湖學派의 예학적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사당 앞의 작은 강당인 養性堂은 1880년 이건 당시에 옮겨진 것이지만, 그 앞 좌우 기숙사인 居敬齋와 精義堂은 최근에 신축한 건물들이다.
凝道堂은 현존하는 서원 강당건물 가운데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다.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3면에 방들을 둘러 배열한 모습이다. 현재는 모두 마루바닥이지만, 원래 방들은 온돌방과 마루방의 두 가지로 복잡하게 구성되었고, 이러한 건물의 구성은 주자가 천명한 서원건축의 예법에 충실하게 부합한다고 한다. 따라서 凝道堂은 性理學의 건축적 예법을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凝道堂은 다른 서원건물들과 달리, 매우 장식적이다. 초석은 높고 둥글게 가공되었고, 기둥 상부의 부재들은 연꽃 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되었으며, 지붕틀 역시 커다란 꽃송이가 활짝 피어있는 모습의 부재로 받쳐지고 있다. 소박과 검소함을 가치로 삼는 영남의 主理派 서원 건물들과 전혀 다르게 자기 과시적인 모습이다. 건물이 높고 크다보니 옆면에는 비가 들이치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옆벽에 작은 지붕을 덧대어서 큰 지붕 양쪽에 작은 지붕들이 조합된 형태가 되었다. 역시 主理派 서원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소한 모습이다.
어설픈 移轉으로 다른 부분의 짜임새가 느슨하다고 할지라도, 遯巖書院의 사당부분만은 어느 서원보다도 완벽하게 짜여져 있다. 견고한 담장들이 정확하게 영역을 구획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3개의 문이 일렬로 서있다. 보통 서원의 사당문은 한 동의 건물에 3칸문을 달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1칸씩 3개의 건물로 독립시킨 것이다. 제사 의례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건물도 정연하게 구축됐지만, 제례에 필요한 부대시설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야간 제사를 밝혀주기 위한 조명대인 燈火臺, 제사 전에 손을 씻기 위한 盥洗臺, 제사의 사회자들이 서있는 贊者石 등, 잘 가공된 석재들이 남아있다.
가장 뛰어난 디자인으로 사당 정면담에 새겨진 문자 그래픽을 꼽고 싶다. 흰 흙벽에 얇은 塼벽돌을 이용해 12글자를 디자인했는데, 그 뜻도 좋지만 기하학적으로 추상화시킨 그래픽이 일품이다. 金長生의 인격적 위대함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地負海涵 : 선생은 땅과 바다 같이 큰 그릇이셨다
博文約禮 : 선생은 해박한 학문으로 예학을 정립하셨다
瑞日和風 : 선생은 해와 같이 화사하고 바람같이 온화하셨다
작지만 큰 기상 – 魯岡書院
遯巖書院에서 멀지 않은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 위치한다. 1675년八松 尹煌(1571-1639)을 봉향하기 위해 영의정 金壽恒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1682년 국가의 공인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그 후 石湖 尹文擧(1606-1672), 魯西 尹宣擧(1610-1669), 明齋 尹拯(1629-1714)을 추가로 배향했다. 尹文擧와 尹宣擧는 형제간으로 尹煌의 아들이며, 少論의 領首로 유명한 尹拯은 尹宣擧의 아들이다. 파평 윤씨 3대를 모신 서원인 셈이다. 가장 후세인긴 하지만, 尹拯은 畿湖學派 性理學을 한 차원 승격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비교적 자유롭게 朱子學의 해석을 시도하였고, 그의 학풍은 후대의 양명학과 실학에도 연결된다. 그의 제자인 鄭齊斗는 조선 陽明學의 거두로서 江華學派를 형성했고, 유명한 중농주의 실학자 柳馨遠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원은 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낮은 구릉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 구릉 위에 사당을 세웠고 그 아래 평지에 강당을 세워 전형적인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강당 앞 좌우로는 4칸 규모의 東齋와 西齋도 보존되어 있다. 강당은 遯巖書院의 凝道堂과 규모만 축소된 채, 형태적으로는 매우 유사하다. 높은 마루면과 높고 당당한 지붕은 마치 누각과도 같고, 지붕틀 부재 역시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두 서원의 강당 건물은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건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앞뒤면 전체에 창호를 달아 외부와 차단하고 있다.
그러나 祠堂의 내용은 크게 다르다. 두 서원 모두 4명씩의 位牌를 모시고 있는데, 그 배열방법 -性理學적으로 말하자면 ‘禮學’이 다르다. 遯巖書院은 중앙에 金長生 위패를, 그 좌우로에 金集, 宋浚吉, 宋時烈의 위패를 배열하고 있다. 부자관계와 친족관계, 그리고 사제관계를 모두 고려해서 배열된 것이다. 반면 魯岡書院은 모두 부자와 형제관계이므로 長幼有序의 원칙에 따라 서쪽부터 尹煌 尹文擧 尹宣擧 尹拯의 위패를 차례로 배열하고 있다. 이른바 고대 예법인 西上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두 서원의 강당이 동일한 형식을 취한 것에서 畿湖學派의 건축적 동질성을 읽을 수 있다면, 사당의 다른 예법에서는 老論과 少論의 예학적 차이를 이해하게 된다.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 두 개의 다른 꽃봉오리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