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2.05.15.
출처
아시아나
분류
건축문화유산

영국 엘리자베스女王이 다녀갈 정도로 한국의 전통적 마을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安東의 河回마을이다. 100여호의 크고 작은 기와집들이 모여있는 이 마을은 한옥주택 뿐 아니라 낙동강이 휘감아 흐르는 넓은 모래 강변과 푸르고 오래된 소나무 숲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서 동쪽으로 험한 산을 넘어 오롯이 자리잡고 있는 屛山書院을 찾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屛山書院은 국내외 건축가들이 뽑은 최고의 한국건축에 항상 랭크되는 명소이며, 명건축이다.

건축- 자연의 프레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屛山書院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하나도 없다. 건물들은 소박하고 평범하며, 특별한 개성도 없다. 다만, 7칸의 기다란, 그러나 텅 비어있는 晩對樓라는 건물만이 눈에 뜨일 뿐이다. 무엇이 최고의 건축이란 말인가? 우선 서원을 감싸고 있는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뒷산인 花山은 이름 그대로 봄꽃이 만발한 아담한 동산이며, 앞산인 屛山은 깍아지른 절벽 사이로 노송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그 앞으로 유려한 낙동강이 흐른다. 강변은 넓고 하얀 모래들이며, 서원과 白沙場 사이에는 曲直한 소나무 열이 흐드러져 있다. 이런 경치를 두고 仙境이라 말할 만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경관은 한반도 전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까운 河回마을의 강변 풍경도 이에 못지 않다. 따라서 경치만으로 屛山書院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뛰어난 경치를 선택할 줄 알았던 인간들의 심미안이 있으며, 그 경치를 건축적 틀에 담아 서원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섬세한 건축적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 앞산인 병산을 강변에서 볼 때는 그저 하나의 잘 생긴 산이지만, 텅 빈 晩對樓에 올라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병산은 7칸 기둥 사이로 쪼개져 각 칸마다 서로 다른 풍경을 연출하여, 마치 7폭의 산수화 병풍과도 같다. 병산은 ‘병풍같이 생긴 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강변에서는 알 수 없었지만, 晩對樓에 올라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晩對樓 위에 올라 자연을 음미하는 것도 일품이지만, 강당 대청 가운데 원장선생의 자리에 꼭 앉아 보아야한다. 외부의 자연경관을 수평적으로 나누고 있을 뿐 아니라, 경치를 수직적으로도 쪼개고 있다. 晩對樓의 마루면과 지붕 사이로는 낙동강의 흐름만이 포착된다. 지붕의 위로는 병산이 독립된 배경으로 나타나고, 마루 밑 아래층으로는 대문간이 들어온다. 정확한 계산에 의해 사람의 통행과 강물의 흐름과 산의 우뚝함을 독자화시킨다. 晩對樓는 그러한 위치, 그러한 높이로 서 있는 타자를 위한 존재다. 晩對樓 자체만 보면 공허한 건물이지만, 자연과 인공의 관계 속에서 비어있음으로 가득찰 수 있는 프레임이다.
晩對樓라는 누각의 이름은 루각의 명칭은 中國 唐代의 시인 杜甫가 쓴 五言律詩 ‘白帝城樓’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가 “…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 하니 / 백제성 계곡에 모여 진하게 노니네 (翠屛宜晩對 白谷倉深遊)”라고 읊은 것과 같이, 동향을 하고 있는 병산에 석양 해가 비치면 병산의 바위와 소나무는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 황금빛 병풍을 晩對樓에서 즐기는 것이다.

戰時首相 -柳成龍

屛山書院은 임진란 전쟁의 격랑을 혼신의 힘으로 헤쳐나간 戰時首相 柳成龍(西厓 柳成龍 1542-1607)을 기념하여 건립된 서원이다. 柳成龍은 河回마을의 실질적인 中興祖였을 뿐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한국의 처칠이며, 조선 성리학의 대를 이은 석학이었다. 24세에 벼슬길에 올라 承文院 禮文館 春秋館 등 주로 학예직 공무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뛰어난 학문과 공정무사한 정치적 역량으로 당시 임금인 선조에게 발탁되어 40세 때 비서실장 (都承旨)을 거쳐 49세 때 드디어 부총리 (右議政)로 등극하였고 내무장관 (吏曹判書)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가 1590년으로 임진왜란을 이태 앞 둔 해였다. 이때 무명의 지방무신이었던 두 사람을 발탁하여 요직에 앉혔으니, 바로 權慄과 李舜臣이었다.
곧이어 발발한 임진왜란의 정국과 전쟁 수행의 막중한 임무를 감당한 이는 柳成龍을 포함한 이 세 인물이었다. 權慄은 육군대원수로, 이순신은 해군사령관으로 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柳成龍은 국방장관(兵曹判書)을 겸하게 되고, 이어 領議政에 올라 군사와 정치를 총지휘하게 된다. 오랜 당쟁을 겪은 조정은 그만큼 인물란에 허덕였다는 이야기도 된다. 임진란의 말미에 정적들의 집요한 탄핵에 의해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 河回에 은거한다. 그는 河回 건너편 芙蓉臺 아래에 玉淵精舍를 짓고 저술과 휴양생활에 들었다. 이때 여기서 저술한 것이 유명한 <懲毖錄>이다. 국보 132호로 지정된 이 책은 임진난이 일어난 1592년부터 終戰된 1598년까지 7년간의 전황을 기록한 기사로, 다시는 이 나라에 이런 참담한 외침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쓴 柳成龍의 自省錄이다.
柳成龍은 당대 최고의 관직을 오래도록 역임했고 전국적 명성을 드날린 정치가였지만, 청렴하기 이를 데 없고 자기 희생적인 지식인이었다. 항상 관직에 있으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자기 절제와 수양에 힘썼던 위인이다.
屛山書院의 전신은 豊岳書堂이다. 고려 공민왕이 안동 일대로 피난왔을 때 안동군민들이 성심껏 받들어 준 것에 보답하여 서당을 세웠는데, 현재의 풍산읍 소재지에 있었다 한다. 그후 柳成龍의 가문인 豊山柳씨들이 가문의 서당으로 유지하다가, 1572년 柳成龍이 인근의 지방관을 역임하던 시절, 병산동의 경승지 – 현재의 屛山書院 자리로 移建하였다. 이때 그는 이건의 이유를 “읍내 도로변은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밝혀 교육장소는 한적하고 자연 속에 파묻혀야 한다는 이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서당건물은 임진란 때 불타버렸고, 柳成龍이 죽은 직후인 1607년 다시 중건된다. 풍악서당이 서원으로 탈바꿈한 것은 1614년 사당인 尊德祠를 건립하여 柳成龍의 위패를 모신 이후다. 이때 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는 愚伏 鄭經世(1563-1633)이며, 柳成龍의 학문을 예학적 차원에서 재정립한 수제자였다. 禮學의 대가답게 서원 건축의 격식도 정연하게 갖추어 일대의 명문 서원으로 성장했으나, 안동 일대에는 20여개의 서원이 난립하여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柳成龍의 제자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보다는 향리에서 은거하는 재야적 지식인들이 많았으므로 屛山書院의 정치적 위상은 다른 야심찬 서원들의 그늘에 오랜 기간 가리웠다. 건립된 지 250년이 지난 1863년에야 겨우 賜額書院으로 공인될 정도였다. 그러나 轉禍爲福이랄까, 大器晩成이랄까 1871년 전국 600여 개의 서원이 불과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을 때 屛山書院은 살아남았다. 안동의 정치적 서원들은 예외없이 모두 사라졌지만, 柳成龍의 검약한 정신을 실현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복이었다.

華花滿開形의 風水地理

한국건축을 감상하는 첫 단계는 건축과 그 지형환경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는 설계과정의 첫 단계이기도 했다. 서원의 입지는 배후마을인 河回로부터는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다. 屛山書院이 비록 柳成龍의 서원이기는 하지만, 씨족마을인 河回만의 가문 서원은 아니었다. 전란 수습의 명재상으로서 그의 영향력은 사후에 더욱 강화되어 안동부 서쪽의 豊山일대 士林가문들의 연합 노력으로 서원이 창건되었다. 직계 제자들이 주축이 되기는 했지만, 창건 멤버들과 이후 운영위원들은 이 지역 유림들을 총망라하여 조직되어왔다. 서원의 운영에 주로 관여했던 씨족은 安東 權, 豊山 柳, 豊山 金, 宣城 李, 順天 金, 眞成 李, 禮安 南 등 4개 면에 걸친 7개 가문이다. 따라서 이들 연합세력을 위한 독자적인 입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柳成龍의 연고가 있고 뛰어난 경치와 소작마을을 가지고 있는 병산동이 그 적지로 선택되었다.
이곳은 또 꽃형국으로 해석된다. 안동 일대의 조산인 鶴駕山에서 시작한 지맥은 서원 뒤 화산에서 끝을 맺는다. 반면, 낙동강을 사이에 둔 앞의 병산은 日月山系로서, 두 개의 큰 지맥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곳에 입지를 정했다. 학가산 일대가 뿌리에 해당한다면, 풍천면 일대의 줄기부를 지나 화산에서 꽃을 피우고, 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定穴 (또는 花穴)이 바로 서원이 된다. 서원 동쪽의 너들大壁은 서쪽의 산세에 비해 높고 강렬하다. 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데, 입수한 물을 동쪽의 강한 산세가 급히 떠미는 이른바 ‘밀개形’의 形局을 이룬다. 때문에 강물이 실어오는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어서, 이곳은 양반지주들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또한 서원 앞의 명당 터가 좁아서 경작지로서도 부적당하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병산마을에는 他姓받이들이 거주했고, 그들 대부분은 서원을 관리하고 서원토지를 소작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밀개형의 형국은 서원의 입지로는 최상으로 꼽힌다. 한적한 분위기는 교육환경에 적합함은 물론이고, 행정권(安東府)으로부터의 격리를 꾀할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밀개형의 형국은 유급하지 않고 빨리 졸업해야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최선의 지리적 이점이기도 했다. 강물을 따라 흐르는 地氣는 서원 학생들의 교육 속도를 높여주고, 산맥을 따라 형성되는 天氣는 교육의 풍부함을 활짝 꽃피우게 한다. 강과 산이 더없이 교육적인 최적의 풍수지리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座式生活을 하는 전통 건물들의 창턱은 거의 없거나 1尺 정도로 낮다. 그래야만 실내에 앉아서 바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원 강당 서쪽방 敬義齋의 창문은 일어나야 할 정도로 높게 설치되어 있다. 또한, 위로 들어 올려야 하는 구조이며, 항상 열어둘 수도 없는 구조다. 따라서 이 창을 열고 바깥을 보려면 일어나서 애써 들어 올리고, 잠시 후에는 닫아야하는 비효율적인 창이다. 이처럼 불편한 창을 왜 만들었을까? 해답은 일어나 열어보아야 알 수 있다. 창을 들어 올리면 멀리 오똑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일명, 文筆峰이라 불리우는 산인데, 마치 카메라의 파인더를 들여다보듯, 오로지 이 산만 창문의 프레임에 잡힌다. 창턱을 높인 까닭은 가까운 여타의 경치들을 가리기 위함이고, 들어올리는 구조를 채택한 이유는 이 산을 늘보지 말고 잠깐만 쳐다보라는 암시이다. 문필봉은 풍수적으로 사람의 지혜를 개발해주는 산이며, 문필봉을 바라보는 것은 서원 유생들에게는 무엇보다 귀중한 학습촉진제였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상복하면 중독되듯이, 아무리 훌륭한 경치라도 아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물들의 구성

서원은 교육부분 -제사부분 -서어비스 부분의 3영역으로 구성된다. 교육부는 강당인 입교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이루어진다. 입교당의 동쪽 온돌방 明誠齋는 원장이 기거하덕 곳이며, 서쪽 방 敬義齋는 교사들의 방이다. 제사부분은 사당인 尊德祠와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典祀廳으로 이루어지면, 서어비스부는 書院奴들의 숙소인 廚所로 구성된다.
屛山書院 건립 당시인 17세기는 예학이 절정에 달했고, 성리학의 성전인 서원들은 엄격한 좌우대칭과 중심축을 고수하는 건축유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屛山書院은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특징적인 것은 교육부와 서어비스부가 나란히 놓이고, 그 사이 높은 위치에 제사부를 배열한 구성이다.
강당과 주소, 그리고 사당의 영역적 관계는 강당 동쪽과 사당 앞에 위치한 마당에서 절묘하게 맺어진다. 즉 수직적으로는 강당영역의 레벨에 속하면서도, 평면적 위치는 사당군에 속하여 두 영역의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다. 이 마당은 평소에는 강당과 주소 사이의 서어비스 동선으로 사용되지만, 제사 때에는 제례를 위해 참가자들이 도열하는 의례용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 통합적 공간은 기능적으로도 통합성을 띠고 있다.
보통 감각으로는 거의 느낄 수 없지만, 세 영역의 중심축은 완전한 평행을 이루지 않는다. 정밀하게 측량한 결과에 의하면 3개의 중심축들은 뒤쪽으로 갈수록 오무러들면서 그 최종적인 지향점은 바로 뒤편 멀리있는 화산의 정상부가 된다. 이른바 ‘미묘한 어긋남’이라고 할까? 그러나 어긋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건축이 자연과 집합되는 방법론의 출발이었다.
서원 전체는 비대칭의 형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세 개의 부분적 영역은 개별적으로 거의 완벽한 대칭으로 구성된다. 전체의 구성은 건축가의 관심사이며 숨겨진 집합체계이지만, 각 영역의 구성은 일반적인 사용자들에게 체험적인 공간이 된다. 이 엄격한 예학자들에게 비대칭의 일상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좌우와 상하의 위계가 뚜렷한 교육부나, 신성한 영역인 사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하인들의 공간인 주소마저도 사대부 살림집인 뜰집유형을 차용해 좌우대칭으로 구성하였다. 건축적으로 屛山書院이 갖는 뛰어난 가치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처럼 대칭적인 부분들을 비대칭적으로 집합시켰다는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