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4.03.05.
출처
KOREANA
분류
건축문화유산

서울의 궁궐들

조선왕조가 서울을 首都로 정한 것은 1394년,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지 2년 후이다. 그동안 전국을 대상으로 新首都의 위치를 물색했지만, 고려왕조의 開城보다 더 나은 곳을 찾는데 2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漢陽 -지금의 景福宮 일대로 터를 잡고 곧바로 도시건설에 착수했다. 이 곳은 고려때 南京이라 하여 고려왕실의 行宮이 있었던 곳이지만, 새 왕조의 궁궐로 쓰기에는 부족해 새로운 궁궐 건설에 착수했다. 또한 동양 전래의 王都 規範에 따라 왕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宗廟 (Royal Shrine)과 서쪽에 社稷壇( )을 건설했다. 1395년에 드디어 正宮인 景福宮이 창건되었다. 이때의 景福宮은 총 390칸으로 매우 소박한 규모였다. 조선왕실은 景福宮 말고도 여러 개의 궁궐을 건설했다. 서울에는 昌德宮, 昌慶宮, 慶雲宮 (현재 德壽宮), 慶熙宮 (현재 시립박물관 터)이 건설되어 景福宮과 더불어 5代宮으로 불리운다. 正宮인 景福宮을 제외한 나머지 4궁궐은 離宮이라하여, 正宮을 사용하지 못할 때 왕실이 기거하던 곳이다. 3대왕인 太宗은 1406년 昌德宮을 준공하여 正宮으로 사용하였으며, 15대 光海君은 1615년 昌慶宮을 復原하여 正宮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왕실이 임시로 사용할 수 있는 行宮들을 건설하였다. 南韓山城과 江華島에는 피난용 궁궐을, 水原과 溫陽에는 나들이용 궁궐을 건설했다.
서울에 있는 5대궁은 공통적인 형식에 따라 건설되었지만, 각 궁궐의 배치는 고유한 변형을 취해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모든 궁궐은 政務領域 – 生活領域 – 庭園施設의 3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3領域의 배치와 구성방법이 매우 상이해 각 궁궐 특유의 특성을 갖는다.
政務領域은 정치행위를 하는 곳으로, 중요한 행정관청와 더불어 왕실회의에 사용되는 몇개의 殿閣으로 구성된다. 이 領域은 가장 핵심적이면서 공식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건물의 형태가 당당하고 幾何學的으로 배치되어 있어 뚜렷한 질서를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正殿-便殿-寢殿의 3건물이 중심을 이룬다. 正殿이란 戴冠式이나 國賓의 영접, 新年賀禮 등 국가 최고의 공식적 행사가 행해지는 곳이다. 따라서 공식행사를 수용할 수 있도록 正殿 앞에 넓고 규격적인 마당이 전개되며, 그 마당을 기다란 行廊으로 감싼다. 列柱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行廊 가운데 광활한 마당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 우뚝 솟은 正殿의 모습은 가히 국가 최고의 상징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데 손색이 없다. 便殿이란 왕과 고위관리들이 모여 일상적인 회의를 열던 곳이다. 궁궐의 상징적인 중심이 正殿이라면, 실질적인 중심은 便殿공간이 된다. 寢殿은 왕의 居所 (dwelling)이다. 조선왕실의 法道를 따라 왕과 왕비의 居所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生活領域은 王族들과 後宮들, 그리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宮人들의 居所이다. 王妃나 王世子, 大妃 등 중요한 왕족들의 居所는 몇개의 建物群으로 형성된 작은 궁으로 독립되었다. 각 작은 궁 사이는 높은 담장과 굳건한 대문으로 구획되며, 그 사이를 迷路와 같이 복잡한 통로들이 연결했다.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위해 취해진 구성들이다. 현존하는 궁궐들의 生活領域은 대부분 철거 훼손되어 과거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庭園領域은 궁궐의 뒤쪽에 배치되어 왕족들이 休息과 遊戱를 즐기던 곳이다. 이 領域 역시 일반 官僚들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으로 연못과 亭子, 수풀과 산책로가 어울어진 곳이다. 대표적인 정원이 昌德宮의 後園으로 ‘秘苑’이라 불려지기도 하는 곳이다. 자연적인 地勢를 이용해 약간의 人工을 가함으로써 傳統 造景의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는 곳이다.

景福宮의 歷史

14세기 말에 創建된 景福宮은 조금씩 확장되어 正宮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1592년 壬辰倭亂 때, 王室은 서울 방어를 포기하고 백성들 몰래 宮을 빠져나가 북쪽으로 피난을 갔다. 이 사실을 전해듣고 격노한 서울 시민들은 왕궁에 불을 질러 철저히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王室은 경복중 재건을 포기하고 昌德宮과 昌慶宮을 수리해 正宮으로 삼아서, 景福宮은 1867년 重建 때까지 273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전쟁 후 즉시 再建하지 않은 이유는 그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당시 국왕들이 景福宮을 불길한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1800년 강력한 君王이었던 正祖가 갑작스럽게 죽은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적 實權은 일부 勢道家門의 손으로 넘어갔고 王室의 힘은 극도로 無力해졌다. 그러나 1864년 긴 기다림 끝에 어린 나이의 高宗이 등극하게 되었고, 왕의 아버지인 興宣大院君이 정치적 實權을 쥐게 되었다. 大院君은 무엇보다 勢道家門을 無力化 시키고 강력한 왕권 정치의 기반을 마련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현재 景福宮의 모습은 大院君 집권 초반의 최대 사업이었고, 강화된 왕권의 상징이었다. 19세기 再建된 景福宮은 14세기 창건 당시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전체 대지 13萬坪 (약40ha)에 350여棟의 많은 건물들, 총 규모 7,225間의 막대한 규모였다. 創建 때 390間과 비교해 18배가 넘는 대규모였다. 따라서 현재의 景福宮은 創建 당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大院君 당시 王室에는 막대한 공사 비용을 충당할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특별 세금를 신설하고, 이전에는 세금이 면제되었던 兩班層에게 까지 세금을 부담시켜서, 비용 충당은 물론 양반층의 세력 약화라는 이중적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왕조는 서양과 일본의 帝國主義 列强의 침략 앞에서 허약한 정권이었고, 왕권 강화란 시대착오적인 정치 형태였다. 막대한 비용을 치른 景福宮 再建은 逆說的으로 兩班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대원군 失脚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40년 후에는 국가 멸망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日帝 强占 이후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景福宮을 훼손하려고 끈길진 만행을 저질렀다. 몰락한 왕족들을 昌德宮으로 옮겨 살게하고, 景福宮 안의 건물 4,000여間을 헐어서 민간 자본에 불하하였다. 王室의 건물들은 남산 일대에 옮겨져 일본인 요리집들로 사용되었다. 1917년 昌德宮에 큰 화재가 나 많은 殿閣들이 불에 탔다. 불 탄 昌德宮을 再建한다는 빌미로 왕비의 寢殿이던 交泰殿을 위시해 200여棟의 중요殿閣들을 헐어 昌德宮으로 옮겼다. 급기야 1926년 正門인 光化門을 헐고 勤政殿 前面에 거대한 朝鮮總督府 건물을 준공하였다. 현재 철거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國立中央博物館이 바로 그 건물이다. 해방 이후에도 훼손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궁궐 안 동편에 현 民俗博物館을 큰 규모로 신축하였고, 주변 도로를 확장하느라 景福宮의 領域은 점점 줄어들었다. 심지어 동남 모퉁이에 있던 東十字閣은 길거리 한 가운데 나앉게 되었고, 서남 모퉁이의 西十字閣은 아예 철거되고 말았다. 1968년 콘크리트 구조로 正門인 光化門을 복원하여 日帝 통치의 상징인 朝鮮總督府 건물을 가린 것이 유일한 복원 노력이었다. 현재 문화체육부는 대대적인 발굴조사 작업을 시행하고 있다. 발굴의 결과 日帝期에 철거된 많은 건물의 기초부분이 나타나고 있으며, 옛 總督府 건물을 철거하고 주요 殿閣들을 복원하여 서울의 중심이며 민족사의 정통성을 상징할 景福宮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복원과 역사 회복의 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일제의 침략도 엄연한 역사적 교훈이며, 완벽한 복원이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반론들이다.

景福宮의 建築的 構成

創建 당시의 모습은 알길이 없다. 20세기 초에 작성된 配置圖가 남아있지만 19세기 再建된 모습만을 전할 뿐이다. 서울의 뒷산인 北岳山 아래 현 世宗路를 잇는 中心軸 위에 중심 殿閣들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하였다. 이 부분이 궁궐의 핵심이며 좌우 대칭의 엄격한 배열은 상징성을 더해 준다. 궁궐의 외곽에는 높은 담장을 쌓고 동서남북 4곳에 大門을 두었다. 이 가운데 南門인 光化門이 正門이지만,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국왕 뿐이었다. 다른 관료들과 왕족들은 동쪽의 建春門과 서쪽의 迎秋門을 사용하도록 되었다.
중심축 위에는 光化門(正門) – 弘禮門(午門) – 勤政門(中門) – 勤政殿(正殿) – 思政殿(便殿) – 康寧殿(王의 寢殿) – 交泰殿(王妃의 寢殿) 을 배열하여 核心領域을 형성했다. 이 領域 左右, 궁궐의 앞부분에는 중요한 행정부서들을 배치해 政務領域을 이룬다. 生活領域은 東門 안 북쪽에 복잡하게 배열되었는데, 지금의 민속박물관 일대이며 현존하는 건물은 慈慶殿과 淸燕樓 뿐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궁궐 뒷부분, 勤政殿 서쪽에는 庭園領域이 전개되었다. 庭園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 바, 慶會樓 일대와 香遠亭 일대이다. 慶會樓 일대는 공식적인 연회나 행사에 쓰였던 곳이고, 香遠亭 일대는 왕족들만의 사적인 庭園이었다. 때문에 慶會樓의 연못은 반듯한 사각형인 반면, 香遠亭 연못은 不定形이다. 香遠亭 일대에는 왕족의 독서실과 휴식소로 쓰였던 咸和堂, 緝敬堂, 八隅亭 등이 남아있다. 현재는 총 20여동의 건물만 남아있어 널찍한 공원의 모습이지만, 19세기에는 17배가 넘는 많은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迷路의 宮殿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조 궁궐 가운데 景福宮 건축의 배치 형식이 가장 원칙적이다. 한동안 正宮으로 사용되었던 昌德宮의 경우는 앞 뒤로 흐르는 산맥 가운데에 위치하여 일정한 中心軸이 없이 左右로 散在된 建物群으로 구성되었다. 昌德宮에서 政務領域의 正殿 좌우로 便殿과 寢殿이 非對稱的으로 배열되며, 生活領域은 登高線을 따라 매우 불규칙하게 배열되었다. 흔히 한국적 조형의 특성이 有機的인 非對稱性에 있다고 한다면, 景福宮 보다는 昌德宮이 더욱 한국적인 구성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昌德宮은 離宮의 기능으로 창건되었고, 넓은 後園의 庭園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구성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상징적이면서도 권위적인 正宮의 역할을 景福宮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서정연한 景福宮의 구성은 다른 궁궐들의 다양한 구성을 보장해 주는 또 다른 역할을 하였다.
또 다른 離宮인 昌慶宮은 중심부분이 東向을 하고 있다. 君王은 남쪽을 향해야 한다는 동양적 규범에서 크게 이탈한 구성이다. 17세기 昌慶宮 再建 당시 이를 南向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反論이 만만치 않았으나, 地形의 생김새를 중요시한 당시의 지식층들은 여러가지 무리함에도 불구하고 東向으로 배치하였다. 그만큼 한국건축에서 地形과 地勢가 차지하는 역할은 대단하였다. 景福宮의 위치도 서울 전체의 地形을 고려해서 가장 핵심이 되는 터를 선택한 것이다. 景福宮 뒤 현재의 靑瓦臺 자리에는 고려왕조의 行宮이 있었다. 그 터는 一國의 正宮으로 삼기에는 너무 좁고, 땅의 기운이 쇠진한 곳이라 하여 앞의 넓은 터를 잡은 것이다. 과거에는 훌륭한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땅을 고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좋은 땅의 조건이란 뒤에 든든한 산을 기대고 앞에는 양지바른 넓은 들이 펼쳐지며, 그 앞에 청량한 물이 흘러야 했고, 좌우 멀리로 산맥이 둘러싼 곳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이유도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중심인 景福宮은 더 말할 필요없이 훌륭한 터다. 뒤의 北岳山은 웅장한 바위산이어서 왕궁의 위엄을 더해준다. 북악산이 없었더라면 景福宮의 위세는 매우 초라해졌을 것이다. 남쪽 멀리로는 南山이 솟아 좋은 景觀을 제공한다. 앞 뒤의 두 산 사이로 淸溪川 (지금은 覆蓋되었음)이 흘러 좋은 땅의 여건을 갖춘다. 또한 동쪽에는 駱山이, 서쪽에는 仁旺山의 山脈이 左右를 감싸준다. 이것이 서울 都城의 地理的 境界이다. 境界를 벗어나면 더 멀리 북쪽에 三角山이, 남쪽에 冠岳山이 솟아있고, 그 사이에 큰 漢江이 흘러 토지를 비옥하게 해 준다. 山脈과 河川이 겹으로 둘러 쌓으니 최상의 터이다. 그런데 멀리 남쪽의 冠岳山은 불의 기운을 강하게 갖고 있어서 옥의 티가 되었다. 불 기운이란 봉건 왕조를 무너뜨리려는 逆謀의 기운이라 해석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한가지 묘책으로 景福宮 정문 앞에 불을 먹고 사는 짐승을 세우기로 했다. 光化門 앞 좌우 한쌍의 돌짐승 조각이 바로 冠岳山의 불을 잡아 먹는다는 전설의 짐승, 해태像이다.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지만 그만큼 地形의 條件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건축을 구성한 것이다.

勤政殿

궁궐건물 가운데 가장 높고 큰 규모로 장엄한 실내공간을 형성한다. 4방향 回廊으로 둘러 싼 적막한 外部空間은 수평적인 모습이며, 그 가운데 二重基壇 위에 우뚝 선 勤政殿의 모습은 수직적인 형상으로 매우 대조적이다. 건물 앞의 넓은 마당에는 거친 質感의 鋪裝石이 깔려 있어서 더욱 근엄한 공간을 형성한다. 가운데 축선에 3줄로 된 길이 나 있고, 그 좌우로 9쌍의 品階石이 설치되었다. 국가의 공식 행사 때 국왕은 勤政殿 내부의 높은 寶座(royal chair)에 앉아서 직급에 따라 品階石 뒤에 도열한 신하들을 지휘한다. 마당 군데군데 遮日을 칠 때 사용했던 鐵製고리들이 남아있다. 널찍한 二重基壇에는 호위 무사들이 도열하여 경호를 담당한다. 전면 중앙 계단과 基壇 위 난간은 12支神像, 나뭇잎, 구름과 鳳凰 彫刻들로 장식했다. 전면 좌우에는 靑銅 香爐와 무쇠로 만든 솥을 두었다. 모두 儀禮와 防火用의 상징들이다.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높은 단층의 공간이다. 內陣部 (nave)에는 높은 기둥들을 세우고, 이 기둥들이 바깥쪽 낮은 기둥을 잡아매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塼乭을 깔아 평탄하며, 한단 높은 곳에 寶座를 두었다. 寶座 윗부분에는 별도의 지붕을 씌워 가장 신성한 장소임을 강조한다. 層高는 높지만 화려한 丹靑과 彫刻들로 짜임새 있는 공간을 형성한다. 견고한 구조와 화려한 장식들과 함께 조선조 최후의 건축적 역량을 총집결한 대표작 중 하나이다.

思政殿

勤政殿 뒤 思政門 안에 자리잡고 있는 單層의 건물이다.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御前會議를 주재하여 실질적인 최고 정치가 행해지던 곳이다. 勤政殿 일대가 넓은 마당을 형성하고 장엄한 記念碑的 尺度 (memorial scale)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서, 思政殿 일대는 온화한 人間的 尺度 (human scale)로 구성되었다. 화려한 장식도 절제되어 있어 勤政殿과 대비된다. 내부에는 왕을 상징하는 두마리 龍이 壁畵로 그려져 있다. 건물 동쪽에는 萬春殿 (현재 없음)을, 서쪽에는 千秋殿을 두어 대칭을 이루었다. 千秋殿은 작은 규모의 건물이지만, 王과 文臣들이 어울려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던 곳이다.

慈慶殿

前任 王妃를 위해 지어진 寢殿이며, 景福宮 내 현존하는 유일한 寢殿이다. 총44間으로 4개의 건물이 복합된 구조이다. 서북쪽은 온돌을 깔아 겨울을 지내는 침실부이고, 중앙부는 낮시간에 기거하면서 정치를 상의하던 부분, 동남쪽은 2층의 마루가 돌출되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어서 시녀들이 기거하던 12間의 부속채가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건물로 다양한 기능을 구성하며, 돌출된 부분들로 외부공간을 분할한다. 慈慶殿 뒤 담은 추상적인 기하학 文樣으로 장식되었으며, 담에 붙여 지은 굴뚝은 10개의 작은 굴뚝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굴뚝 벽면에 조각된 동물과 식물들은 長壽와 健康을 기원하는 전래의 그림들이다.

峨眉山과 慶會樓

勤政殿 서쪽에 큰 사각연못을 파고 2층 樓閣인 慶會樓를 세웠다. 이 연못을 판 흙으로 思政殿 뒤편의 峨嵋山을 만들었다. 峨嵋山은 왕비의 寢殿이었던 交泰殿 (현재 없음)의 뒤 庭園이다. 4段의 계단식 花壇에 꽃을 심고, 육각형 굴뚝들이 옥외조각과 같이 설치되었다. 왕비의 庭園답게 景福宮의 시설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이다.
慶會樓와 사각연못(方池)은 王室의 공식적인 연회장소로 외국사절의 접대에 쓰이던 곳이다. 연못 안 동쪽에 치우쳐 떠 있는 이 누각은 엄청나게 큰 내부공간을 갖는다. 따라서 지붕의 경사면은 層高에 비해 거대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外形의 比例가 일그러질 위험이 있었다. 慶會樓는 尺度의 歪曲을 통해 이러한 시각적 위험을 극복했다. 아래층의 層高를 두배로 높이고 높은 돌기둥을 세움으로써, 상대적으로 낮은 2층의 層高와 나무기둥들을 눈에 뜨이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시각적 조작을 통해 멀리서 보면 마치 單層의 안정된 건물과 같이 보인다.

香遠亭

慶會樓 일대가 공식적인 庭園이라면, 香遠亭 일대는 王室 전용의 私的인 庭園이다. 이 주변에는 王室의 讀書室, 書庫 등이 배열되어 조용한 思索과 休息의 공간을 이룬다. 연못의 형태도 부정형이며 연못 안에 원형의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의 亭子를 세웠다. 지금은 남쪽에 나무다리가 놓여 건너갈 수 있지만, 원래는 북쪽에 놓였었다. 2층으로 구성되었고 육각형 지붕 꼭대기에는 靑銅으로 만든 節甁筒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