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7.03.01.
출처
행복이 가득한 집
분류
건축문화유산

서양이나 일본주택의 대문은 담장 사이에 설치한다. 반면 우리나라 상류주택의 대문은 대문채라고 하는 건물의 한 칸에 설치한다. 따라서 출입은 대문이 아니라 ‘문칸’, 즉 대문이 설치되는 공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대문채 다른 부분의 지붕보다 문칸의 지붕만 더 높게 만든 것이 소슬 대문, 이런 지붕을 ‘소슬 지붕’이라 부른다.
현대주택의 대문이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등 들고나는 사람들을 선별하기 위한 장치라면, 전통주택의 대문들은 다분히 상징적인 요소였다. 대문은 우선 신분을 상징했다. 싸리나무로 얼기설기 역은 사립문은 가져갈 것이 하나도 없으니 들어오려면 언제든지 오라는 서민 살림집의대문이었다. 반면 최고급의 대문이라할 소슬 대문은 지킬 것이 많고 가릴 것이 많은 부잣집에 쓰였다. 원래 소슬대문이란 정이품 이상의 고위 관료들의 집에만 사용되던 것이다. 그 높은 대감들은 초헌이라고하는 바퀴달린 가마을 타고 다녔고, 초헌 위에 앉으면 일반 대문에는 머리에 쓴 갓이 걸리기 때문에 문칸의 지붕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슬대문이 있는 집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나마 고위관료들이 밀집해 사는 서울의 북촌 쪽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양상이 달라진다. 지붕 곳곳에도 소슬대문을 가진 집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집들의 주인이 고위관료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관직과는 관계없이 돈이 많고 그것을 과시하고 싶은 집이면 너나 할 것 없이 문칸의 지붕을 높이기를 주저않았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초기에는 어림없었을 일이다. 청빈과 절제를 이상으로 삼던 전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점차 사라지고, 경제력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실용적인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18-19세기 들어서는 이른바 ‘부농’이라는 계층들이 토지 합병과 매수를 통해서 개인적 필요를 초과하는 재산을 지니게 된다. 적어도 한고을에 10% 정도의 인구가 잉여재산을 쌓을 수 있었다. 물론 부의 편중은 절대적으로 빈곤한 계층을 양산하는 역현상도 수반했다. 재산가들이 많아짐으로써 그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주택을 꾸미기 시작한다.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대문과 담장이었다. 더 높게, 더 우람하게 쌓고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부을 자랑했고, 이루지 못한 사회적 지위를 보상받으려 했다.
지리산 맡 자락, 좁지 않은 분지에 자리잡은 남사마을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부농마을이다. 보통 한 성씨가 한마을의 주류를 이루었던 전통적인 씨족마을과는 달리, 이 마을에는 이씨 최씨 하씨 정씨 등 3-4 가문의 성씨들이 등을 맞대고 살아왔다. 따라서 이들간에 벌어졌던 유형무형의 경쟁의 흔적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있다. 모든 마을 길들은 서로 통하지 않는 막힌 골목이다. 뻔히 보이는 옆집도 다른 전용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어서 낯선 이들은 길찾기에 무진 애를 먹는다. 다른 가문과 같은 길을 쓰기를 꺼렸던 결과다. 이 마을 집들의 담장은 무척이나 높다. 특히 사양정사라는 집의 담과 소슬대문의 높이는 아마도 전국 최고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소슬대문이 단지 과시효과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대문은 한 집안의 기가 들락거리는 출구로 생각했다. 따라서 꼭 필요한 위치에 꼭 필요한 크기만큼 설치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집의 크기와도 비례를 맞추었다. 한국 주택들을 탐방할 때는 꼭 대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볼 필요가 있다. 무엇인가 중요하고 아름다운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 대문의 위치와 크기를 정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