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22대 왕인 정조는 역대 최고의 계몽군주라 평가됩니다. 세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문물을 진흥시키고, 뿌리 깊은 당쟁을 중지시키고 왕권을 강화했던 인물입니다. 개혁 노력의 결정판은 지금의 수원에 건설한 화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인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비참하게 죽인 뒤에 손자인 어린 이산을 세손으로 삼았습니다. 왕으로 즉위한 정조의 제일성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친아버지의 죽음은 정조에게 최대의 트라우마이자, 개혁정치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수원부 소재지가 있던 곳으로 옮기고, 새로운 수원부 소재지를 만들기 위해 화성을 건립합니다. 당시에도 신도시 건설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법한 국가적인 대사였지만, 국왕의 효도라는 강력한 명분 앞에서 어느 누구도 반대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전통적인 방어용 성곽은 산성이었습니다. 평시에는 읍성이라는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는 멀리 떨어진 산성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항전을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성 방어에 성공하여 읍성으로 돌아오면, 이미 적들의 노략질에 도시는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재산은 잿더미로 변해 버렸지요. 실학자들은 이 모순을 맹렬하게 지적했습니다. 산성무용론을 부르짖으며, 일상의 도시를 튼튼하게 방어하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수원 화성은 이러한 실학의 실용적 배경에서 탄생했습니다. 화성을 마치 산성과 같이 견고하게 구축하고, 그 안의 도시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화성 설계는 당시 31세의 젊은 실학자였던 정약용에게 맡겼습니다. 아마도 한국 역사상 최고 천재 중의 한 사람인 정약용은 어명을 받든지 2년 만에 역대 성곽을 답사하여 장단점을 분석하고, 중국의 새로운 기술들을 섭렵하여 독창적인 성곽을 설계하여 정조에게 바칩니다. 이미 중국은 서양 성제의 장점을 받아들인 상태였고, 이를 정약용이 집대성하여, 수원 화성은 동서고금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한 성곽의 정수라고 평가됩니다.
화성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방어시설들이 개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벽 밖으로 돌출된 치성을 만들어 성벽에 붙어있는 적들을 측면에서 공격하게 한다든지, 성문 위에 큰 수조를 만들어 성문에 불이 붙으면 즉시 끌 수 있도록 방화수를 저장한다든지, 밖에서는 감추어진 암문을 만들어 성곽 내외를 연결하는 비밀통로를 확보한다는 등,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시설들을 고안했습니다.
전통적인 성곽은 돌로 쌓았는데, 육중한 돌만 가지고는 정교한 성곽을 만들 수 없어서 화성의 많은 부분에는 벽돌을 사용했습니다. 당시에 벽돌은 중국에서만 사용하던 새로운 재료였기 때문에 벽돌을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까지 개발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중기를 원형으로 그 효율을 극대화한 거중기를 발명하여 공사를 편리하게 하고, 공사 자재 반입을 위해 간편한 수레를 새로 발명하고, 자재를 효율적으로 운반하도록 도로를 닦았고, 완공 후에는 진입로로 사용했습니다. 공사 임금을 일당제로 지급하던 관례를 깨고 성과급제로 지급하여, 공사 기간을 혁신적으로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화성은 설계부터 시공과 노무관리까지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고안으로 시종일관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성곽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곽으로 에워산 내부의 도시입니다. 성곽은 단지 도시를 보호하고 에워싸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지요. 정조는 화성을 상업과 자영 농업에 기반을 둔 자급도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화성 주변에 집단 농장인 둔전을 지급하고, 효율적인 농사를 위해 가구당 한 마리씩의 소를 빌려주었고, 곳곳에 저수지를 파서 농업용수를 확보했습니다.
성 밖이 자급을 위한 배후 생산기지라면, 성 안은 근대적 상업지역으로 계획했습니다. 성 안의 간선도로 변에 점방을 분양하여 일종의 상가를 조성했습니다. 상업을 진흥하기 위해서 입주하는 상인들에게 저리의 초기 자금을 융자해주었고, 그 결과 개성상인들이 대거 수원에 분점을 차리는 효과도 거두었습니다. 관청이 시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아전들이 주민의 대다수였던 기존 도시에 비한다면 정말 혁명적으로 발전한 근대적 이상도시였습니다.
수원 화성은 1799년에 성곽은 완공하면서 신흥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이듬 해에 정조가 급서하면서 화성에 대한 국가적 지원도 중단되었습니다. 정조 사후에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정조의 개혁 정치를 되돌리는 데 골몰했고, 그 결정판인 화성을 홀대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수원 화성은 성곽은 완성했으나 도시는 본격적인 틀을 갖추지 못한 미완성의 도시로 남았습니다.
다행히도 정조는 책으로 된 또 하나의 화성을 남겼습니다. 일종의 공사기록 보고서라 할 수 있는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입니다. 여기에는 화성 축성의 배경과 개념, 성곽과 도시의 설계그림, 설계의도와 재료, 공사방법과 공사기구, 재정과 공사일지 등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수록했습니다. 이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200년간 훼손된 화성성곽을 복원할 수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었습니다.
수원 화성의 사상과 의미를 강조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가치를 빠뜨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수원 화성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군사 방어시설 답지 않게 정교하고, 부드럽고 섬세하게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독창적입니다. 저는 비슷한 시기에 저술한 중국의 서적에 수원 화성에 고안된 시설들이 이미 언급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 화성의 독창성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중국의 성곽들을 직접 본 후에는 오히려 더 화성의 우수함을 재평가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중국의 성제들을 많은 부분 수용했지만, 화성 디자인의 탁월함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지형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성곽의 조형성, 원리를 지키면서도 변화무쌍한 유연함,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민본사상의 인간적 친밀함 등은 도저히 중국 성곽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가치들입니다. 원본보다 더 위대한 디자인을 이미 200년 전에 달성한 것입니다. 수원 화성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독창성이 사라진 현재의 디자인 능력을 부끄럽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