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12.01.20.
출처
SERI-세계유산 시리즈
분류
건축문화유산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은 모두 5개입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일제에 의해 없어졌다가 근자에 복원한 경희궁입니다. 이 궁궐들은 모두 일정 시기에 왕들이 거처했던 곳입니다. 서울을 벗어나면 더 많은 궁궐들이 있었습니다. 수원과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행궁이 있었고, 멀리 함흥과 온양에도 행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조선 왕조는 하나인데 이처럼 많은 궁궐들이 있었을까요? 왕권의 과시였을까요, 아니면 권력의 횡포였을까요?
그러나 모든 궁궐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우선, 궁궐에도 정궁과 이궁, 별궁이라는 서열이 있었습니다. 정궁은 왕조가 상시 거주하는 궁궐로서 경복궁과 창덕궁이 해당합니다. 이궁은 왕조가 일시적으로 옮겨 단기간 사용하는 보조 궁궐로 서울의 창경궁과 덕수궁, 경희궁이 해당합니다. 그리고 별궁은 특별한 기능을 갖고 왕이 행차하여 잠깐 머무르는 곳으로 지방의 행궁들이나 서울에 있었던 안동별궁 등이 해당합니다. 물론 정궁의 규모가 이궁보다 크고 격식이 높으며, 별궁은 소규모의 궁궐입니다.
조선 태조는 북악산 밑에 경복궁을 지어 정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2대 정종은 즉위하자마자 개성으로 천도하여 한양과 경복궁을 비웠습니다. 다시 3대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했으나 황폐화된 경복궁에 입주하지 않고 매봉 밑에 창덕궁을 지어 정궁으로 삼았습니다. 태종이 창덕궁을 지은 이유는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친 형제를 척살하고 왕위를 쟁취한 무대가 바로 경복궁이어서 회피했다는 정치적 해석이 유력합니다.
그러나 도시적 측면에서 본다면 창덕궁 창건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양의 지형을 풍수적으로 해석하면 배산임수의 탁월한 왕도의 형국이라 합니다. 단, 주산인 북악산이 너무 서쪽으로 치우쳐서 인왕산과 붙어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정궁인 경복궁은 주산 밑에 지어야했고, 경복궁 앞 세종로에는 중요 관청들이 자리 잡아 도시의 중심을 형성했는데, 북악산이 서쪽으로 치우친 까닭으로 도시의 중심도 서쪽에 몰려버렸습니다. 태종의 창덕궁은 한양의 동쪽에 또 하나의 도심을 만듦으로써, 경복궁과 함께 한양의 동쪽과 서쪽의 균형발전을 꾀하는 보완책이었습니다.
140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불과 287칸이었습니다. 755칸의 경복궁에 비해서도 작은 규모의 이궁이었습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이 7,000여 칸이었던 것에 비한다면 정말 초라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 보다 창덕궁을 더 선호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불타 버린 경복궁을 외면한 채, 창덕궁을 재건하고 280여 년 동안 이곳을 아예 정궁으로 삼았습니다.
창덕궁은 어떤 면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와 지형에 세워졌습니다. 매봉 자락 산등성이 불규칙한 경사지에 입지했기 때문에, 궁궐이라면 필수적인 넓은 평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 앞쪽으로는 이미 종묘가 궁궐의 정면을 가로 막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창덕궁은 이 불리한 조건들을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일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왕궁은 보통 정연한 축선과 규칙적인 배열로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중국의 자금성이나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이 대표적이고, 한국의 경복궁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덕궁은 전혀 다르게, 건물들은 불규칙하게 놓였고, 담장과 행랑들은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보통 궁궐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우람한 전각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창덕궁 정면에서는 아무 것도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정전인 인정전까지 가려면 두 번이나 동선을 꺾어 들어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창덕궁의 건물들은 드러나기 보다는 숨어 있습니다. 모두가 불규칙한 지형에 맞추어 계획하고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지형의 변화는 그대로 건축공간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앞의 건물보다 뒤의 건물터가 높다보니, 같은 단층 건물이라도 뒤의 건물이 앞의 건물 위로 올라가 매우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궁궐의 길들은 꺾이고 사라지면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며 다양하게 이어집니다. 궁궐의 모든 장소와 공간들은 각기 독특한 모습과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전체로 통일됩니다.
규모로는 십 여배에 이르는 중국의 자금성을 창덕궁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자금성의 공간이 획일적이고 지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다양함과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창덕궁은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덕궁은 절대적으로 규모가 작아서 바로 옆에 창경궁을 짓고 부족한 시설들을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창덕궁과 창경궁은 비록 명칭은 두 개이지만, 하나의 복합궁궐로 봐야하고, 이를 일컬어 ‘동궐’이라 불렀습니다. 또, 창경궁과 연결된 앞쪽의 종묘까지 합친다면, 동궐은 경복궁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됩니다. 이 동궐의 북쪽에는 궁궐의 정원인 후원이 전개되고, 이 정원을 때로는 비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후원에서 완성됩니다. 궁궐 건물들이 들어선 땅보다 훨씬 더 거대한 영역이 후원의 땅입니다. 후원의 지형은 능선과 골짜기가 더욱 뚜렷하고 많은 산골입니다. 4개의 골짜기를 택해서 4개의 주제가 뚜렷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부용지 정원, 애련정 정원, 존덕정 정원, 그리고 가장 깊이 자리 잡은 옥류천 정원입니다. 각 정원들은 앞 뒤 능선으로 둘러싸여서, 한 정원에서 다른 정원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역시 자연 지형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면서, 최소한의 시설들을 보완한 결과이지요. 자연 자체를 정원의 중요한 경관으로 삼았던 지혜의 발로였습니다. 이 후원은 한 눈으로 즐기는 정원이 아니라, 능선을 오르내리며 하나하나 체험하는 총체적인 정원이었습니다.
창덕궁과 후원은 불규칙한 경사지라는 불리한 지형을 잘 활용하여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독창적인 궁궐을 만들었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격언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요? 무엇을 하는 데 불리한 환경이란 없을 것 같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잘 분석하고 그 잠재력을 끌어내어 특성화시킨 성공적인 사례를 창덕궁에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