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부터 21일까지 2주일 동안, 강남의 아셈과 코엑스 콤플렉스에서는 유례없는 디자인 국제대회가 열렸다. 새천년 준비위원회가 기획하고 연세대학교가 조직한 “새천년 건설환경 디자인 세계대회”였다. 이 대회는 국내에서 벌어진 학술 이벤트로는 획기적인 몇 가지 기록을 세울 것이다.
우선 대회의 규모이다. “인간-지구-문화를 존중하는 창의성”이라는 주제로 유니버설 디자인 세계대회, 그린 디자인 세계대회, 문화 디자인 세계대회 등 3가지의 국제 학술대회를 연이어 개최한 놀랄만한 집중력이다. 하나의 국제대회를 개최하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주제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과 설전들, 연사들의 초청과정에서 몇 번씩 주고 받아야하는 왕복 서신과 통화들, 비행편의 선정과 우송, 숙식 조건의 제안과 승인, 스케쥴의 제2, 제3 확인, 공항 영접과 편의 제공, 회의 개최와 리셉션, 회의 결과 검토와 발간사업 등 수많은 인원들과 조직위원회가 1년 내내 쉬지 않고 움직여야 개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국제 학술회의다. 이 어려운 작업을 3개씩이나, 그것도 쉴 틈 없이 개최한 것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또한, 대회에 초청된 인사들의 면면도 기록적이다. 외국 소식에 어두운 필자가 들어본 인물만도 챨스 꼬레아, 로베르타 눌, 그렉 린, 마리오 보타, 후미히코 마키, 사스키아 사센, 파올로 솔레리, 장 빌모트, 아모스 라포포트, 하세가와 후미오, 후카오 세이치, 안트완 페레독, 크라크 르웰린 등 세계 건축계의 거장들과 석학들을 망라하고 있다. 국내인사도 뒤질세라, 승효상, 조병수, 고주석 등 꽤 유명한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외국 초청진 가운데 한사람이 개별적으로 내한하여 강연회를 가져도 3-4백명의 관객들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중량급들을 단시간에 모을 수 있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깝다.
이처럼 엄청난 세계대회를 치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새천년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5억 정도로 추산되는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이며 내용이다. 흘러나오는 이야기로는 이 대회를 주관한 몇몇 교수들이 팔방으로 뛰어다녀 기업체의 협찬들을 얻어 충당했다니, 그 자금 동원력과 열성적인 설득 작업 역시 놀랄만 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아쉽게도 이 황금 같은 대회의 여러 행사들에 참여하지 못했다. 단지 대회 마지막 날 있었던 문화 디자인 투어에 자원 가이드의 자격으로 참여한 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필자가 이 대회의 성과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오로지 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같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있었던 건축계 연관 인사로서 개인적인 소감만을 말할 뿐이다.
대회 규모와 행사 종류가 웬만해야 마음먹고 참석하지, 이처럼 방대한 행사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참석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아예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기 쉽다. 아무리 대단한 행사가 있다해도, 생업과 개인적 사정을 젖혀두고 2주일 간 온종일을 참석하기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필자 뿐은 아닌 것 같다. 주변의 건축계 인사들에게 물어보면, 대회를 조직했던 핵심 멤버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자신의 발표 때나 참가했을 뿐, 다른 귀중한 강연이나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대회에 초청받은 미국 모 건축대학의 학장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 하루 저녁을 같이 지낼 수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발표가 있기 전날 내한하여, 다른 이들의 발표장에 있기보다는 서울의 곳곳을 방문하는데 열심이었다. 그에게 대회의 소감을 물어보니 낯뜨거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긍정적인 대답을 하려 애를 쓰면서도, 한가지 뼈아픈 지적을 했다. 대회 주최측이나 참석자들 모두 대회의 규모와 유명 인사와의 인사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발표 내용에 대한 질문이나 소개는 찾기 어렵고, 누가 어떤 대단한 인물인가에 대한 평가와 찬사만 난무하다는 지적이었다. 그에게서는 초청해준 주최측에 대한 고마움이나, 대회에서 얻은 소득에 대한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이번 기회에 한국과 서울을 체험하고 있다는 즐거움 뿐이었다.
이번 대회에 초청된 거물급 인사들만도 줄잡아도 30여명에 이른다. 이른바, 세계적인 석학 또는 디자이너라 이름해도 부족함이 없는 분들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단 한번의 강연이나 세미나에만 참석하고 급히 한국을 떠났다 한다. 너무나 유명하다는 것은 너무나 바쁘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이 1-2주일 동안 대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석학이라 해도 비싼 항공료와 체제비, 강연료를 지불하는 마당에 1회용으로 쓰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애석하다. 그리고, 너무 많은 석학들을 모았기 때문에, 개개인은 빛이 나지 않았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널린 게 석학이요, 대가들이었다.
미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애니와이즈 Ani-wise?>란 국제적인 세미나가 있다. 몇 년 전 한국에서도 개최된 적이 있는 이 대회는 매년 세계 각 도시를 순회하면서 3-4일 동안 특정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방식이다. 참가 인원은 건축에 관련된 세계적 석학이나 건축가들인데,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며칠 간 주제 발표와 격론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담론을 생산한다. 관객들은 대가들이 서로 논쟁하고 공박하면서 새로운 비젼을 제시해 나가는 과정을 마치 운동경기를 감상하듯, 생생한 논리의 현장에서 때론 흥분하고 때론 웃으면서 연사들과 일체감을 형성하는 회의 운영이었다. 이처럼 국제학술대회의 분위기도 1회성 강연형에서, 며칠간의 워크샾형으로 개최형식이 변화되고 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찾은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새천년 세계대회에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대회의 목표와 주제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우선, 유니버설 디자인 – 그린 디자인 – 문화 디자인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 별도의 대회를 치른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 세 영역 사이의 명확한 차이는 있는 것인가? 디자인과 환경과 인문학과 문화예술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세계적인 추세와는 달리 굳이 세 영역을 구분하여 분리 개최한 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주최측의 기획의도가 있을 법한데, 그렇다면 그것은 대회의 가장 큰 담론으로 부각될 만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 3개의 대회 가운데 하나만 개최했더라도 그 규모나 국제성이 손상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비슷비슷한 주제를 가진 3개의 대회를 연속적으로 개최하려던 아이디어의 장점은 부각되지 못한 채, 어디까지 끝이고 시작인지 모호한 일정으로 시종한 점이 못내 안타깝다.
대회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이 미치지 못한 점도 나타난다. 주최측인 연세대학교의 지대한 노력, 특히 특정학과 교수진과 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분이 완벽하지는 못했다. 예컨데 부속된 전시회의 경우, 디지탈 분야와 환경분야, 심지어는 전통 공예분야까지 합성된 복합 전시회여서, 뚜렷한 주제를 찾기도 어려웠고, 감동도 일지 않았다. 행사를 위한 전시회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필자가 참여했던 1일 전통건축물 답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프로그램을 대행한 여행사 관계자만 나타났을 뿐, 주최측의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10여명의 외국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전공한 사람들인지 명단도 전달받지 못한 채, 마치 상업적인 관광사의 하루 상품과 같이 지내고 말았다. 주최측의 노고를 감안해서 도와주었던 필자였지만, 이 행사가 왜 있어야하는지, 누구를 위해 진행되는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회 개최 전에도 여러 차례 당황스러운 적이 있었다. 국내 발표자들을 선정하려면 제안된 논문들을 심사하는 과정이 있다. 필자도 몇 편의 심사의뢰를 받아 수행했는데, 그 뒤에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또한 하다못해 논문 심사에 대한 감사의 편지라도 보냈어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도 생각했다. 필자 뿐 아니라, 우리 학과의 다른 교수는 싸이버 디자인 작품들을 일주일이 걸려 어렵사리 심사해 주었는데, 그 역시 후속 소식이 없어 못 마땅해 하는 중이다.
누가 개최를 하던 국가적 차원의 국제 대회에는 거국적인 협조와 이해가 필요하다. 대부분 그러한 이해 때문에 행사에 참여하고 협조했을 것이다. 또한 방대한 대회를 준비하다 보면 사소한 실수나 누락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대회하 해서 외국의 참석자들만 우대받고 국내의 협조자들에게는 무관심한 태도는 고쳐야 할 것이다. 한번으로 끝날 것이면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그런 태도로는 다시 국내에서 같은 대회를 개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의 신뢰가 약해졌지 때문에, 이번과 같은 협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외자의 위치에서 이번 대회를 평가하자면, 야심찬 계획과 방대한 규모에 비해서 효과적인 기획이 부족했다고 보인다. 또한 준비와 시행과정에서도 조직적이지는 못해서 여러 측면의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최측의 추진력과 돌파력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또 다시 이런 형태의 국제 대회를 연다고 해서 새천년이 의미있게 되고, 한국의 문화와 지성이 홍보되지는 않으리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