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2000년입니다. 21세기다, 새천년이다 대단한 기대와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다지 희망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책상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빛바랜 강연 원고를 발견했습니다. 1993년에 준비된 21세기 건축에 대한 전망이 내용이었는데, 가장 큰 전제는 2000년까지는 남북교류 혹은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세계사적 이벤트를 대비하려면 세계 건축계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건축적 역량을 길러야하고, 길러질 것이라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시대의 뚜껑을 여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요. 통일은 고사하고, 남북한 학술교류조차 불가능하며, 오로지 금강산 개발을 담보한 거대 자본만이 왕래할 뿐입니다. 세계 건축계에 떠오르기는 커녕, 건축시장 개방조치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 보면서 여전히 곁눈질 세계화와 집안 싸움에 열중입니다.
지난해는 처음 맞는 ‘건축문화의 해’였습니다. 야심찬 기획과 성대한 행사들, 그리고 희생적으로 참여한 몇몇 건축인들의 성과가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축의 해를 빛낸 이들은 비리로 언론의 조명을 받은 건축계 어른들이었습니다. 년초에는 건축의 해 조직위원장께서 비리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더니, 년말에는 서울시내 유명대학의 건축과 교수들 명단이 무더기로 신문에 오르내렸습니다. 그 가운데는 신진 40대 교수들도 혜성같이 등장하여, 건축계의 연공서열을 파괴하는 부패의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바깥에서는 WTO다, UIA다 하는 신자유주의의 야수적인 파고가 밀려오는 가운데, 이것이 건축의 해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정녕 새시대는 오는 것이고, 희망은 있는 겁니까? 존경할 원로는 사라지고, 어떤 지도단체도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현실에서, 한세기 동안 왜곡되어 왔던 건축실무와 교육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하는 엄청난 과제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 새롭게 이상건축의 편집주간을 맡으면서 영광과 기대보다는 중압감이 앞섭니다.
창간 7년을 넘긴 이상건축은 그동안 많은 성과를 이루어 왔습니다. 부산에서 발간된 유일한 지방건축지라는 한계를 넘어서 유수한 전국적인 잡지로 성장하였고, 의미있는 기획과 행사들로 한국건축문화 발전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자평합니다. 무엇보다도, 시각적 자료집의 차원을 넘어서 읽고 생각할 만한 내용이 있는 지성지로서 성장한 것을 기뻐합니다. 전임 편집주간인 강혁 교수의 뛰어난 공로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후임이라는 포지션 때문에 제 자신의 능력과 열정이 불안합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한 시대에, 중년에 들어 무엇하나 보탬이 되어야한다는 생각만으로 시작합니다.
2000년도에는 다방면에 걸친 잠재력과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특히 산산 조각난 건축계의 리더쉽을 점검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또한 세대간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원로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동시에, 신진들을 발굴하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2000년 말에는 13번째 잡지로 ‘이론과 실천’을 탐색하는 이론지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틀에 밖힌 아카데미즘과 뿌리없는 저널리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건축계에 심도있는 담론을 제공하려 합니다. 이 모든 시도는 궁극적으로 우리 건축계의 무너진 리더쉽을 복원하고, 사라진 정신적 가치를 재건하고, 혼미한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려는데 방향을 맞출 것입니다. 이상건축은 더욱 현실적인 동시에 이론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편집위원진의 개편과 판형의 변화 등은 이러한 변화를 위한 기초 작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포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동지적 관심과 참여 속에서만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새해, 새세기, 새천년에 문안 인사를 올리면서, 새로운 역사를 같이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