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까지 런던의 AA School에서 뒤늦은 유학의 경험을 맛 보았다. 그 학교는 알려진대로 자하 하디드와 렘 쿨하스를 배출한 디컨스트럭션의 본거지이다. 필자가 수학한 역사 이론과정은 디컨스트럭션의 이론적 방어를 위한 치밀한 공정의 쇄뇌공장이었다. 애초부터 언어 장애의 문제를 안고 있는 데다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유희론부터 시작되는 생경한 현학들은 그야말로 나의 존재를 ‘분열’시키고 나의 이성을 ‘단편’으로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와 해체의 공정은 무척 매력적이어서, 세미나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기존의 거대이론과 전체주의적 관념이 모두 허구였고 이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한 희열에 ‘파르르 떨리는’ 감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성이란 마르쿠제의 ‘도구적 이성’의 역사관과 스위지의 ‘거대’한 정치경제학에 길들여져 있었고, 나라는 존재는 자본주의 단계가 전기인지 후기에 속하는지도 불확실한 한반도라는 사회의 산물에 불과했다. 더욱이 디컨스트럭션의 철학과는 오히려 무관해 보이기까지 하는 디컨스트럭션의 건축이 우리 사회에 정당한 디스코오스가 될 수 밖에는 없는가 하는 의문은 학습의 휴식시간 마다 엄습하는 ‘우상’의 고통이었다. 마침 세미나의 주관 교수는 미쉘 푸코를 전공한 철학자여서 강요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서양 철학의 빛이 우리 사회를 인도해 줄 것이라고 믿어 왔다. 우리는 헤겔의 가르침을 착실히 따라 왔고 젊은이들은 그 교리를 목숨으로 실천했으며, 이성과 주체의 위대함은 현실의 질곡과 고통을 감내할 만한 궁극적 목표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꼬르뷔제와 미이스를 기꺼이 스승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주체를 부정하고 이성을 해체한다면, 당신들이 가르쳐 온 제3세계는 어쩌란 말인가. 당신들의 돌파구라는 디컨스럭션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논리가 아닌가?” 짧은 영어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대충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담당 교수로서는 황당하고 억지에 가까운 항의라고 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황 끝의 대답인 즉, “아시아는 아시아의 문제이다. 우리는 모르겠다. 왜 당신들의 문제를 서양의 철학에서 해답을 구하는가.” 짧고도 매정한 답변.
유럽에서의 일년 동안 항상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한국 건축계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이론가요, 실무 건축가들로 부터도 촉망받는 실천적 학자인 K교수. 스스로 근대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그의 순수하고 정확한 언설은 서울의 저널리즘과 학계를 풍미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떠 오른 것은 평소 접했던 그의 학식과 주장이 과연 세계 건축의 흐름과 역사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었다는 유럽 현지에서의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동양권에서만 공부한 그이의 학문과 안목이 가진 세계성 보편성에 부러움과 함께 주눅이 들 수 밖에. 귀국 후 가장 만나고 싶었던 분 중의 하나였다. 짧은 바깥에서의 공부로 오히려 증폭된 나의 혼란을 해결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드디어 그를 만날 날이 있었는 데, 그러나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불쑥 한편의 에세이를 내밀었다. “아돌프 로스의 묘를 찾아간 이유”. 어떤 건축잡지에 기고할 컬럼의 초고였다. 내용인 즉 – 그 컬럼의 중요성 때문에 그 잡지의 최근호는 꼭 읽어 보기를 독자들께 권한다 – 현재 건축계 일각에서 풍미하는 해체건축의 지리멸렬함과 추종자들의 혼돈된 사고 때문에 한국 건축의 위상을 걱정한다는 것, 그리고 로스 등의 근대건축의 가르침은 아직도 유효하며 건축의 본질적 내용이라는 것. 그러나 그가 초고를 보여준 진의는 그러한 글을 쓰면서도 과연 근대건축과 그 이론들이 종말을 고했는가 그리고 이제부터의 건축은 디컨스트럭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가하는 답답함 때문이요, 부족한 후배인 나에게조차 정답의 실마리를 구하고 싶은 절박함이었다. 물론 나는 답을 주기는 커녕 서로의 답답함을 배가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일년만의 공백 후에 그 동안의 건축잡지들을 검색해 보니 해체건축의 특집과 그러한 형태적 경향의 작품들이 곳곳에서 눈에 띤다. 키취와 존재의 가벼움과 데리다와 아이젠만의 텍스트 비평과 근대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까지도. 가히 한국 건축은 어느덧 탈근대 해 버렸고, 우리 사회는 전자시대의 이념으로 철저히 무장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형 현상설계에서는 권위주의적 前근대건축적 대안들이 당선되며, 정치계의 19세기적 권력 다툼의 이합집산이 온 매스컴의 머릿 기사를 장식한다. 첨단 산업과 국제적 경쟁력 육성이라는 이동통신과 고속전철과 신공항건설은 여전히 정치적 시각과 경제적 계산 때문에 일각의 반대에 직면해 있다. 이처럼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혼재되어 있는 사회에서 정당한 건축과 이론은 무엇인가? 서울의 K교수께 부탁하고 싶다. 우리 건축계에 해답을 던져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고 근대주의자로서의 더욱 깊이있는 사색과 연구를 기대한다고. 그러나 그 노력들이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고. 런던의 건축이론가들에게 큰소리 치고 싶다. 그래, 우리의 해답은 우리가 찾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당신들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것이라고. 그러나 …아, 참을 수 없도록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