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10.04.
출처
중앙일보
분류
건축론

1. 한국건축사 속의 문화개방과 국제주의 건축

세기말 세기초는 혼란과 모색의 시기이다. 지난 20세기 한국건축의 성과는 무엇이며, 21세기 건축은 어떻게 변모해 나갈까? 특히 금세기 건축적 성과에 대해 자신이 없는 우리로서는 다가올 미래는 자신의 실력이 국제적으로 노출되는 개방의 시대요, 미국 일본 중심의 국제적인 정보 뿐 아니라 유럽과 제3세계의 건축까지 물밀듯이 밀려오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더욱이 국가 목표로 정한 “세계화”의 담론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대응해야하는 지도 뷸투명하여 불안만을 조장하고 있다.
한국건축사를 통찰해 보면, 이러한 국제화의 파고나 외래문화 이입의 충격을 비단 지금만 겪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7세기-9세기까지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권은 당나라를 중심으로 거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여 어마어마한 규모로 인적 물적 교류가 벌어진 시기였다. 건축적으로도 이시기의 삼국건축은 서로 구별이 안될 정도로 유사하였다. 한국의 경우 유물이 남아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새롭게 유입된 중국건축을 아예 “당양唐樣”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일본건축에 큰 충격을 준 형식으로 수용하였다.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다시 말하면, 이 시기는 최초의 국제주의 건축양식이 아시아권에 만연되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또 몽고의 침입을 받고 1세기에 걸친 식민상태에 있었던 고려 중기의 문화와 건축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보다 더욱 극심하고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통일신라기의 건축이나, 고려 중기의 건축이 단순히 외래건축의 유입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한국건축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자리매김했고, 외래건축의 유입은 오히려 민족건축 발전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외국의 영향이 거의없고 순수하게 한국적이었던 시기가 조선후기인데, 그 시기의 건축에서 한국적인 고유성은 발견될 지언정 보편적인 건축의 질은 역사상 가장 퇴조한 시기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문화적 개방은 한국건축을 성숙시키는 긍정적인 기회로 작용했음을, 그리고 폐쇄의 시기는 바로 문화 퇴행의 시기였음을 입증해 주는 교훈이다. 그러나 그 국제화의 시기에 저절로 한국건축이 발전한 것은 아니다. 서역과 중국건축의 홍수 속에서도 김대성과 같은 건축 엘리트는 유입된 외래 건축술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해석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다. 또 몽고의 침략기에도 최영과 정몽주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잔재 청산을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전통의 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기술인가, 정신인가?

미래에 대한 예견 가운데 인습적으로 대두하는 것은 소위 하이테크 사회에 대한 필연성이다. 범세계적인 정보와 통신의 발달, 유전자 공학을 통한 생명의 신비 제거, 전자공학의 발달을 통한 인공지능 존재의 탄생 등. 따라서 미래의 건축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법과 구조기술, 하이테크 재료의 개발, 인공지능을 활용한 인텔리젼트 빌딩의 생산 등에 대한 연구에 지금의 역량을 집중해야한다는 논리가 뒤따른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한국건축의 낙후성의 원인이 새로운 기술의 습득이나 연구개발을 게을리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 이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대학의 학자들과 학생들이 몰두하는 “건축역사와 이론에 대한 연구열은 ‘왜곡된 지적 유희’이며, 현실을 도피하는 잘못된 관행”이라는 것이다. (본지 46호의 논설 인용)
일면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시각은 현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고있다. 현재의 문제는 기술자의 부족에 있지않다. 해외공사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건설업체들의 기술수준을 보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원인은 낙후된 기술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책자의 잘못된 목표와 전시행정과 이를 수용한 재벌기업의 비윤리성에 있는 것이다. 남산 외인아파트를 폭파 해체한 해프닝도 따지고 보면 개발 신드롬에 걸린 당시의 서울시 행정과, 고층 아파트 건설을 통해 기술적 잉여가 있으리라 환영했던 무책임한 당시의 건축계에 있는 것이다. 건축교육은 어떠한가. 일본인들은 조선의 학생들에게 제도와 시공술과 목공술을 가르쳤을 뿐이며, 이 기술교육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서, 공과대학에 건축학과가 속한 세계에서 유이한 -일본포함- 나라가 되고 말았다. 현재 교육과 학문의 문제는 “동서양의 건축역사와 이론에 과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지적은 전국 대학원의 현황을 볼 때 사실이 아닐 뿐더러, 역사와 이론 연구에 “과도한” 투자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현실과 유리된 이른바 건축계획연구와, 진짜 과도한 구조 환경연구에 편중된 학풍이 위험하다. 왜냐하면, 현대의 건축이란 기술의 차원을 넘어선지 오래이며 이미 지식학적 차원으로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과 학문 풍토는 세계적인 추세에 뒤진지 오래이며, 현재의 수준은 18세기 폴리테크닉의 이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기술 우위의 시대가 도래할 수록, 인간의 선택과 판단은 더욱 중요해진다. 기계공학과 고체역학이 지배하던 이른바 ‘제1 기계시대’에서는 기술이 지시하는 대로 건축이 움직여온 측면도 있다. 생각은 있지만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해 이루어지지 않은 건축적 아이디어도 숱하게 있어왔다. 맨하탄을 자신의 구조물로 덮겠다던 풀러의 호언이나, 걸어다니는 도시 움직이는 도시를 제안했던 아키그램의 무책임한 치기는 당시의 기술로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일종의 흥미로 받아들여 졌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인간이 마음먹은 대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기술은 발달하였고, 그 기술의 핵심은 형체도 운동의 궤적도 보이지 않는 전자공학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강대국의 권력집단이 마음만 먹으면 지구라는 혹성을 반쪽 낼 수도 있고, 일개 고등학생이 국가 전산망의 중요한 기밀을 조작할 수도 있다. 기술 우위의 사회가 될수록 중요한 것은 그 엄청난 기술들을 제어할 수 있고, 기술 응용의 목표를 제시하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정신의 존재다. 하이테크 시대가 도래할 수록,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계획술 구조공학 시공기술 환경기술을 통제하고 활용하고 제어할 수 있는 창조적인 건축이론과 확고한 역사관이다. 한국건축이 기술의 수준에만 매달려 있는 동안, 부가가치가 높은 디자인 시장은 외국의 2류 건축가들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다. 영종도 공항을 보라. 한국의 내놓라하는 대형 건축설계회사들이 미국의 디벨로퍼 그룹의 충실한 하청업체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최고의 인텔리젼트 빌딩이라고 자랑하는 포스코사옥은 기본설계-일본, 실시설계-한국의 국제 분담을 영광스럽게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의사의 처방을 받아 충실하게 조약을 하고 있는 약제사와 같이.
하이테크 시대, 세계화 시대에 건축이론과 역사는 왜 필요한가? 일반적인 개업의들은 특별한 기초의학의 연구가 없어도 환자진료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들의 환자 대부분은 감기와 배탈환자들이므로. 그러나 심장판막증 정도의 난치병이나 에이즈와 같은 인류의 재난을 치유하려면 기초의학의 발전은 필수적이다. 판에 밖은 아파트나 자본주가 스케치해 준 근린상가를 허가내 주는 데에 이론이고 역사고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언제까지 허가방에 수준에 만족하고, 관공사 로비스트로 만족하고 있을 것인가? 이미 훨씬 더 세련되고 기술적 우위를 확보한 외제 허가방들이 국내시장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당당한 건축가의 자격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세계건축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 세계화의 요건이라고 할 때, 건축의 이론과 역사이라는 무기없이 무엇으로 대처해 나갈 것인가? 미래는 예측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대상이다.

김 봉 렬 현재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 공학박사
문화체육부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