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중력, 지면
이디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의 박물관 지하에 키 110cm의 자그마한, 유인원과 인류 사이의 중간 쯤 되는 존재의 화석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318만 년 전에 살았던 이 종의 학명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인류의 어머니’ ‘최초의 이브’ 등 어마어마한 별명이 붙은 가장 유명한 화석이다. 이 화석의 발견 당시, 발굴단원들이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즐겨 들었다 해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이 화석을 루시라고 불렀다.
침팬지와 비슷한 외모였을 루시를 최초의 인류라고 하는 이유는 일어서서 두발로 보행할 수 있는 골반과 발의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루시의 종 이전의 유인원들은 나무 위에 살았고 긴 팔을 이용해 나무 사이를 이동했다. 나무 위에서 내려와 땅 위를 걷기 시작한 그 순간이 바로 유인원에서 인류로 진화되는 순간이었다. 유인원의 두 손은 나뭇가지를 단단히 잡아야했기 때문에 엄지와 다른 네 손가락이 반대로 굽게 되었다. 직립 보행으로 자유롭게 된 두 손은 나뭇가지 대신 도구를 쥐고 창조와 폭력을 행하는 ‘도구적 인간’이 되었다.
땅바닥이란 나무 위의 유인원들에게는 추락사할 때 만나는 죽음의 평면이었지만, 직립 보행의 인류에게는 삶의 터전이요 이동의 통로가 되었다. 나무 위의 유인원들은 중력의 한계와 맞서 살아야했다. 중력에 끌려 몸이 떨어지면 죽음이었고, 열매가 익어 떨어지기 전에 따야 하니 설익은 과실만 먹을 수 있었다. 지면은 중력과 반발력이 평행을 이루는 유일한 면이었다. 지면 위에서 걷는 인간들에게 중력은 더 이상 위험한 힘이 아니라 사물의 위치를 고정하고 그 사이로 이동하는 인간에게 방향과 좌표를 부여하는 안정된 힘이 된다. 중력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바닥면의 발견, 바닥이란 인류가 만난 최초의 건축 공간 요소가 되었다.
움직이는 바닥과 고정된 바닥
인간은 바닥 위에 서거나 앉거나 눕는다. 육체노동은 주로 서서 한다. 또 서야 이동할 수 있다. 앉아서는 휴식을 취하거나 주로 정신적인 노동을 한다. 누워 쉬고 자면서 노동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재충전하여 다시 노동의 일상으로 회귀한다. 중력을 거슬러 선다는 것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육체적 활동을 하는 것이며, 중력에 육체를 맡겨 눕는다는 것은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서거나 눕는데 특별한 장치는 필요 없다. 신발이나 보료는 견디기 힘든 지면의 질감이나 온도를 보완하기 위함이지, 중력과는 관계가 없는 보조 도구이다. 그러나 앉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 바닥 위에 또 하나의 떠있는 고정된 바닥면이 필요하다. 허공에 앉으려면 온 몸의 에너지를 엉거주춤 자세를 유지하는데 쏟아야한다. 이른바 의자와 같은 별도의 바닥이 있어서 또 다른 중력면을 형성해야 정신적 작업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 아마도 최초의 인공적인 바닥은 의자로 대표되는 이동형 장치일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정착 생활을 시작한 초기 인류들은 땅을 파고 내려간 움집에 살았고, 흙바닥의 냉기와 습기, 작업의 편리함을 위해 간단한 의자를 고안했을 것이다. 조리나 기구 수선 등 실내 작업은 집 바닥 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의자의 높이도 지면에 밀착되어 18cm 내외로 낮았다. 이처럼 낮은 높이의 의자는 현재도 유목민들의 이동용 가구로 흔하게 남아있고, 동아시아권의 목욕탕에서도 잘 이용하고 있다. 작업 테이블을 고안해 사용하게 되면서 40cm내외로 높아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
지면에서 지하로 내려간 움집과 대조적으로 지면 위에 띄운 고정 바닥도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이른바 고상형 건축에 쓰인 건축 바닥으로 나무 위에 걸기도 하지만, 기둥이나 벽 등 수직 요소 위에 또 하나의 수평면을 만들었다. 2층 이상의 층, 누각, 옥상 등 다양한 위치와 용도로 쓰인 이 떠 있는 바닥들은 대개 시공이 간편한 나무 널을 이용했다.
마루와 온돌의 발생
건축에서 마루는 나무 널로 만든 바닥을 의미한다. 그의 어원은 ‘ᄆᆞ래’ ‘미루’ 등 다양하지만 대개 ‘높다’는 뜻으로 산마루, 용마루 등 용례가 있다. 건축의 마루란 지면 보다 높은 곳에 떠있는 바닥의 이름이다. 떠있는 바닥은 인장력이 강한 재료로 만들어야 했고, 강철이 발명되기 이전, 고인장 재료는 나무였기 때문에 마루는 나무 바닥을 뜻하는 의미 변화가 일어났다. 고구려 집은 한 건물이 방 하나나 둘인 원룸 또는 투룸이었다. 동대자 유적과 같이 최상류층의 집은 방 하나의 크기가 40여 평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방 바닥은 흙다짐 또는 전돌 바닥이고, 고분 벽화에서 흔히 보듯, 방의 일부분에 침상을 만들어 기거했다. 침상寢床 또는 좌상坐床은 목구조에 나무 널을 깐 ‘부분 마루’였다. <고구려 탑상>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묘사된 좌상을 모티브로 창작 재현한 부분마루다. 반고정식인 부분 마루가 점차 넓이를 넓혀가고 방 한 칸의 기둥에 고정되면 ‘마루방’이 되고, 여러 칸을 마루가 차지하면 ‘대청’이 된다.
온돌은 ‘따뜻한 돌 바닥면’이란 의미다. 온돌을 만들려면 불길이 지나는 구들이 있어야한다. 고구려 집들은 아궁이에서 출발해 집 내부 벽면을 따라 ㄱ자 꺾인 ‘쪽구들’을 설치했다. 집안에 신발을 신고 생활하다 쪽구들에 올라앉든가 누울 때만 신을 벗는 입식 생활이었다. 쪽구들은 일종의 눕힌 굴뚝과 같아 불길이 지나는 고래가 한 줄이지만, 시대가 지나며 기술이 발전하면 두세 줄을 겹쳐 구들 면을 넓힐 수 있다. 양주 <회암사 서승당>의 ‘탁상구들’은 한 방 안에 탁상형 구들들이 두 개의 ㅌ자가 마주보는 듯 배열한 예다. 통로부분엔 신을 신고, 구들 위에선 벗는 이중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구성이다. 고래의 수를 늘려 겹쳐 설치하면 하나의 방바닥 전체를 구들로 채우는 ‘온통구들’을 만들 수 있다. 물론 화력을 골고루 분산 시킬 수 있는 장치와 기술들이 필요해 17세기 이후에야 일반화된 방법이다.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 움집에서 원초적인 온돌의 흔적이 나타난다. 이를 고구려 쪽구들과 같이 지면 위로 들어 올리는 데 수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온통구들로 발전하는 데 천여 년이 필요했다.
한옥은 흔히 “한 지붕 아래 온돌과 마루가 공존하는 집”이라 한다. 두 바닥이 가장 중요한 한옥의 요소라는 말이다. 온돌은 불을 가까이하고 바닥면이 낮을수록 열효율이 높은 겨울용 바닥이다. 마루는 불을 멀리하고 바닥이 높아지려 하는 여름용 바닥이다.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바닥을 하나의 건물에, 동일 수평면상에 수용한 것은 한옥의 위대한 성취이며, 건축적 성공이었다.
고저차는 성속과 계급의 차이
대지를 딛고 일어 선 인간은 땅 위를 내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며 물속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세계의 수직적 체험은 수직적 세계관을 탄생시킨다. 하늘에는 신들의 신성한 세계가 있고, 지하에는 죽음의 세계가 있다. 그 사이 지상에 인간들의 행복과 고통이 있다. 또는 천-지-인 삼재신앙과 같이 하늘엔 영혼이, 땅 속엔 기백이, 지상엔 육체의 세상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높은 곳엔 생명과 신성이, 낮은 곳엔 죽음과 공포가 있다는 믿음을 공통적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3개의 폴리스로 이루어졌다. 도시의 높은 산 위에는 아크로폴리스, 낮은 곳에 네크로폴리스, 그리고 그 사이 중간 영역에 인간들의 도시인 폴리스를 건설했다. 신들의 도시인 아크로폴리스에 신전들을 건설했고, 죽은 자들의 도시인 네크로폴리스에는 묘지를 조성했다. 폴리스의 인간들은 눈을 위로 들어 신들을 우러러봤고, 아래로 내려 죽은 자들을 추모했다. 도시 바닥면의 높이 차이가 가져온 신앙과 시선의 체계였다.
계급적 차이는 곧 바닥면의 차이가 되었다. 높은 곳은 신성하고 낮은 곳은 비천하다. 자연 지형의 높낮이가 없는 평야지역에서는 인위적인 수직 고저차이를 건설해야했다. 중국 중원지역에는 인공적인 산, 고대(高臺)를 쌓아 그 위에 궁전을 짓거나 왕릉을 만들었다. 마야문명 지역의 피라미드 역시 돌로 쌓은 아크로폴리스였다.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은 페르세폴리스와 같이 아예 높은 인공대지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42,000여 평에 달하는 광대한 도시를 높이 10m의 석축을 쌓아 건설한 제왕의 도시였다. 중산층을 일컫는 부르주아(bourgeois)는 원래 성곽(bourg) 안에 사는 선택된 주민들을 뜻하는 용어였다. 성곽이라는 수평적 경계보다 훨씬 큰 격차는 고대나 페르세폴리스의 인공대지와 같은 수직적 경계였다. 대 위는 제왕과 통치자의 세계고, 대 아래는 노예와 피지배민의 세상이었다.
종교 건축의 경우, 내부 바닥면의 높낮이가 신성도를 결정했다. 모든 종교건축은 신자들의 영역인 배소와 신성영역인 성소로 구획된다. 배소의 바닥은 일상의 바닥면과 동일하게 낮고, 성소는 인위적인 단이나 대를 쌓아 높다. 고대 이집트의 신전들은 내부로 들어갈수록 바닥을 높이고 천장을 낮추어 공간의 밀도를 농축시켰다. 외부는 속(the profane)이고 내부는 성(the sacred)의 세계이며, 낮은 바닥에서 점차 높은 바닥으로 전이한다. 불단 위의 불상, 교상 위의 신위 등도 바닥 차이로 만든 신앙의 공간이다. ‘성과 속’의 고저차는 세속적 조직의 위계에도 적용된다. 제왕의 자리는 단 위에 있고, 신하들은 단 아래에 있다. 제국주의 시대 법정은 판사석이 높은 단 위에 있었고, 교실에는 선생만이 오르는 교단이 있었다.
변화하는 바닥높이
바닥의 높이가 달라지면 그 위에 서거나 앉은 인간의 시선도 달라진다. 높을수록 대상을 내려다보고, 낮을수록 올려다본다. 특히 외부경관을 즐기려는 조망용 건축에서 바닥 높이는 가장 중요한 건축 요소가 된다. 시선의 변화는 자연의 경관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어, 해변에 서서 바다를 보면 해안선과 수평선 등 주로 선적 요소를 감지하지만, 높은 곳에서 조감하면 바다는 면으로 보인다. 강릉의 경포호수에 있는 누각, <경포대>는 한 건물 안에 4개의 바닥면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아랫단은 개방된 기단 윗면으로 일종의 스탠딩 플로어이고, 한 단 높은 마루 면은 잔치 때 공연의 무대가 된다. 두 단 높은 마루 면은 양반들의 객석이며, 여기서 경포호를 내려다볼 수 있다. 천장이 닿을 정도로 높인 마지막 마루 면은 소수의 객들이 올라 경포호를 극한적으로 조망하는 곳이다.
경포대의 바닥과 같이 전통적인 실내 바닥 변화는 불연속적이었다. 현대건축은 연속적인 바닥의 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SANNA가 설계한 스위스 로잔느공대의 Rollex Learning Center는 거대한 실내에 일절 칸막이 없이 단일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천장면은 단일한 수평면으로 변화가 없지만, 바닥은 마치 잔잔한 파도와 같이 굴곡져 변화한다. 경사져 낮아지는 부분은 강의부가 되고, 높아지는 부분은 개인적 휴식공간이 된다. 각 부분의 지정된 기능은 없지만, 각 부분의 공간적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집단적 동의가 일어나고 있다. 학습센터의 바닥 변화는 원 설계에는 드라마틱할 정도였는데, 실행 과정에서 많은 부분 순화되었다. 바닥은 중력과 지지력이 평행을 이루는 힘의 전선이며,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촉각적 요소다. 바닥이 기울면 넘어져 다치기 쉽고, 계단이 많으면 관절에 무리를 준다. 재질이 부드러우면 눕고 싶고, 딱딱하면 조심하게 된다. 높이차, 재질, 경사도, 시각적 구성, 공간의 위계, 이용자의 신분 등 바닥의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는 복합적이다. 벽과 천장은 단지 바라보는 대상으로 공용적 성격이지만, 바닥은 이용자가 점유하는 곳으로 각자의 영역이 뚜렷하게 나누어지는 개체화된 요소이다.
바닥의 다양한 해석
아름지기 재단은 3년마다 주전시(?)를 열어왔다. 최근의 주제는 <소통하는 경계, 문 (2014)>, <해를 가리다 –장막(2017)>, 그리고 올해는 <바닥, ᄃᆞ뎌 오르다>이다. 우연히도 문은 수직적 벽의 요소, 장막은 천장의 요소, 그리고 바닥이다. 벽, 천장, 바닥은 건축적 공간을 이루는 3대 요소다. 올해의 전시는 그 마지막이자 가장 신체적이고 직접적인 바닥을 다룬다. 너무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주제이며, 기본적인 물음은 늘 가장 어렵고 범위가 넓으면 혼란스럽다.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참여 작가들은 각자의 과녁을 만들고 적중시켰다.
한국적 건축의 현대적 실현에 노력하는 온지음 집공방은 3(4?)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고구려탑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2차원적 그림에 묘사된 탑상을 실물로 재현했다. 이는 이동이 가능한 가구라기보다, 부분마루로서 고정된 마루의 초기적 형태라 볼 수 있다. 그 낮은 높이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유목민적 전통을 가진 고구려인들이 익숙한, 그러나 지금은 낯선 높이의 바닥이기 때문이다. <…….>는 강릉 경포대 내부바닥의 고저차를 추상적으로 재현했다. 높이차는 그대로지만 바닥의 면적이나 놓이는 위치는 다르다. 바닥의 차이를 신체로 체험하고 시선의 변화를 느끼는, 바닥만으로 이루어진 건축이다.
양주 회암사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놀라운 온돌 유적을 발견했다. 서승당의 탁상형 구들이다. 입식과 좌식생활을 겸할 수 있는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온돌이었다. <…….>는 회암사 서승당의 감동을 온돌의 변천사로 풀어 본 작품이다. ㄱ자 쪽구들, ㄷ자 탁상형구들, 그리고 익숙한 온통구들을 병치했다. 마루는 높이 차이를 만드는데 특화된 바닥이라면, 온돌은 넓이 차이를 만드는데 특화되었다. <………..>는 바닥면의 자유로운 확장과 변화에 대해 온지음 집공방과 최종하 작가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다. 넓이의 변화에 따라 신체의 적응이 달라지는 ‘등-탑-상’의 이동형 바닥의 의미론적 변화도 함께 읽을 수 있다.
2차원의 바닥면이 올라오면 3차원의 가구가 된다. 차원 이동 작업에 천착해 온 최종하 작가는 <De-dimenstion / 서안>, <타일>을 전시한다. 차원 이동은 개념일 뿐 아니라 신체를 얹을 수 있는 실물이기도 하다. 김현종 작가의 <무-경계>는 전통적인 마루의 모티브를 유니트화된 구조물의 집합으로 해석했다. 개별적 유니트는 추상화된 가구와도 같지만, 집합적 존재는 독특한 바닥을 형성하며, 2차원의 바닥이 4차원의 시공간을 형성하게 한다. 새로운 마루, 차원 이동의 마루가 출현했다. 개념을 실제화하는 작업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정교한 디테일을 요구한다. 이 험난한 장애들을 넘어 우리 앞에 출현한 작품의 의미를 읽어야한다.
건축가 서승모는 현대 주거 내부에서 변화하는 공간들을 창조해 왔다. <잃어버린 바닥>은 익숙한 아파트 내부의 한 부분을 재구성한다. 발코니 확장, 알파룸 등 한국 아파트만의 고유한 편법들을 통해 상실한 소중한 요소와 공간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전시장이자 대상물인 아름지기 사옥의 경관에 주목해 바닥면을 되찾았다. 최윤성 디렉터가 재단 이사장실을 비우고 다시 채운 <Fully floored Studio>는 제목 그대로 바닥만으로 이룬 실내공간이다. 비좁은 원룸 생활에 익숙한 작가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 꾸어왔던 꿈을 추상화 이상화시켰다. 이사짐을 가지고 현관문을 열면 펼쳐지는 그 텅 빈 바닥들. 최윤성의 스튜디오는 그 당혹감 대신에 가구와 바닥면이 일체화된 풍요로운 변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