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4.01.14.
출처
조성룡회갑기념집
분류
건축문화유산

우리 가족이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내의 취미가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아이가 아직 어렸을 시절 아내는 뒤늦게 클래식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승용차보다 비싼 값을 치루고 산 중고 기타는 당시 소장품으로는 가장 귀중한 물건이 될 정도였다. 그만큼 기타 연주에 집념을 보였으나 실력은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언제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칠 수 있을까?”는 바람은 이루기 힘든 욕망이 되고 있었다.
그 아쉬움 속에서 1년간 런던 생활이 주어지자 아내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비록 연주는 어렵지만 같은 유럽 땅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직접 방문해서 대리만족을 이루려는 희망이었고, 서양건축사 교과서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역사적 건축이어서 스페인 여행은 서로에게 합리화 될 수 있었다. 런던에서 자동차를 몰고 대서양을 건너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안달루시아 땅에 닿기까지, 오랜 희망과 준비의 긴 여정에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아련한 선율이 늘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예비지식이 필요하다. 타레가는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에 얽힌 중세 스페인의 전설을 모티브로 최고의 기타 명곡 ‘알함브라’를 작곡했다.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슬람교도들인 무어인의 왕국이 있었고, 기독교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최후의 방어선인 그라나다에 포위된 마지막 순간, 알함브라 궁전에 있던 가련한 공주의 이야기와 심정을 트레모로의 애잔한 선율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예수회의 고향일 정도로 카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이슬람 건축이며, 대표 음악이 이슬람의 추억이라니. 그때 스페인 여행의 목표는 알함브라와 코르도바에 있는 대모스크였다.
알함브라는 명성 그대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란 이집트와 그리스 신전- 중세의 교회 -절대왕정의 궁전으로 이어지는 주류 서양건축의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거대함으로 인간의 기를 죽이는 규모의 폭력이 없다. 또한 한 눈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집중력도 없다. 기괴한 신상이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조각상들도 없고, 벽면과 천장에 천지창조나 신의 영광을 그린 스펙타클도 없다. 끝없이 반복하는 기하학적 문양들만 있을 뿐이고, 석재의 중량감을 제거해버린 가녀린 기둥과 마치 종유석과 같이 투각된 벽면들이 있을 뿐이다. 주류 서구건축이 절대 권력적 미학을 전통으로 구축했다면, 알함브라는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인간적인 미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면이나 사진의 알함브라는 적막한 중정에 놓여진 사자 분수에서 한줄기 분수가 뿜어 나오고 뜨겁게 쏟아지는 햇살은 투각한 벽체를 통해 아라베스크 문양의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우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경악스러웠다. 중정 안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가득 채워 건축적 실체를 볼 수 없었고, 온갖 언어들이 뒤섞인 소음으로 아름다운 기타 선율과 같은 애잔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랭스 대성당이나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아무리 많은 인파가 몰려도 고딕과 바로크의 절대공간은 파괴되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적 스케일을 훨씬 뛰어넘는 초월성과 거대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여명의 관광객만 몰려도 알함브라의 공간을 파괴되고 만다. 그만큼 인간적이라고 할까?
그 아쉬움을 달래며 이슬람 공간의 실체를 온전히 볼 수 있었던 곳은 코르도바의 모스크였다. 역시 중세 무어인들이 스페인에 남겨놓은 유산이며,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모스크라 꼽아도 될 곳이다. 물론 이란 이라크 등 다른 이슬람 국가에 뛰어난 모스크들이 있지만 전쟁지역이라 가기도 어렵고, 간다한들 이교도에게는 개방하지 않으니,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고 조사할 수 있는 코르도바의 모스크를 대표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와 유태교, 그리고 이슬람은 같은 뿌리에서 성장한 세 개의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5경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신앙하는 종교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위대한 믿음의 선조로 섬기고, 메시아가 출현해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리라는 믿음도 같다. 단지, 기독교는 2000년 전 이 땅에서 나타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를 메시아라 믿지만, 유태교와 이슬람은 예수는 위대한 인간일 뿐 메시아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비교적 근접한 종교이니, 건축이야 달라도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것도 지중해를 낀 한 지역에서 벌어졌던 건축이었으니.
이 정도의 사전지식을 가지고 생애 처음 만나는 모스크를 향할 때, 기독교 교회의 바실리카형 공간 정도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비례로 디자인된 모스크의 정면은 최고의 솜씨로 치장되어 있고, 그 앞에는 여유있는 광장이 있어 신도들의 집회도 가능하리라. 내부에는 넓은 예배석이 있고 그 중앙에는 한줄기 빛이 쏟아지는 신성한 제단과 성직자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설픈 예상은 첫 입구부터 산산이 깨져버렸다. 모스크는 사방이 두터운 벽으로 쌓여져 있고, 거대한 벽에는 단지 구조적인 버팀기둥들만 세워졌을 뿐, 벽면을 장식하는 어떤 요소도 발견할 수 없다. 그나마 대문의 형식을 가진 입구가 없다면 어디가 정면인지도 알 수 없는 생경한 외관이었다. 물론 그 앞에는 진입로만 있을 뿐, 광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의 전통건축은 물론, 동양권의 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정면성의 건축이다.
모스크의 정면은 내부에 숨겨져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게 비워진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의 넓이는 모스크 전체의 1/3에 달한다. 놀라운 것은 마당에 면하는 모스크의 정면은 바깥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달리 적당한 형태와 장식이 부여되었다는 점이다. 후에 여행한 아랍권의 모스크들에서도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이지만, 도시에 대해서는 높은 담장으로 폐쇄되어 무표정한 반면, 일단 내부 중정에 면한 건물의 외벽은 놀랄 만큼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실제 정면은 중정을 면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신전들, 중세의 기독교 교회들, 그리고 현대의 대형공간들은 서로 기능은 다를 수 있으나 공통되는 일정한 경향성이 있다. 내부의 중심공간을 기둥 없는 단일공간으로 구성하기 위해 당시의 기술이 허용하는 한 최대의 기둥간격을 확보한다. 기둥간격을 최대화하되 무너지지 않는 지붕구조를 만드는 기술의 진보가 곧 유럽건축의 물리적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소중한 주공간은 부수적인 공간들에 의해 둘러 싸여진다. 바실리카 교회의 주공간인 네이브와 부수공간인 아일의 관계를 보면, 내부공간에서도 주-부의 계층적 위계가 뚜렷한 분화를 볼 수 있다. 또한, 주공간에는 시각적 상징적 중심이 존재하며 모든 시선과 빛은 그 중심을 향해 조작되어 하나의 공간 안에서도 뚜렷한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코르도바 모스크의 내부공간은 이러한 주류공간의 역사를 거부하는 충격적인 구성이었다. 전체공간은 한 변이 140여m에 달하는 대규모지만, 38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열주들이 18줄이나 서서 기다란 19개의 예배 공간, 정확하게는 741칸의 작은 단위공간들로 쪼개져 있다. 기둥간격은 불과 4m를 조금 넘어서 30m를 훌쩍 넘는 기독교 교회의 대형공간에 익숙한 눈에는 너무 낯설게 보인다. 모든 기둥과 기둥열의 간격은 주-부 공간을 나눌 수 없도록 일정하게 반복되어 있다. 그리고 어느 곳에도 제단이나 설교단과 같은 중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상징적인 중심이 설정되었다고 할지라도, 촘촘히 심어진 기둥들이 시각을 방해하여 중심을 바라볼 수 없도록 구성되었다.
4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모든 단위공간은 크기와 높이가 일정하고, 일절 외부의 빛도 유입되지 않아 균일한 조도를 유지하고 있다. 내부공간 전체를 균질한 개별공간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그렇다고 이집트 카르낙 신전의 대열주실과 같이 기둥들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기둥의 크기는 가급적 얇게 최소화되었고, 눈에 띄는 장식도 없다. 오히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상부 아치에 얼룩줄무늬를 칠해서 단위공간들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야말로 ‘중심과 상징이 없는 공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모든 부분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다.
코르도바 모스크 내부 중앙에는 카톨릭 성당이 세워졌다. 기독교도들이 코르도바를 점령한 후에 7줄의 기둥 열을 파괴하고 바실리카형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6칸이 하나의 내부공간으로 통합되고, 기존의 모스크 공간보다 높게 솟은 이 기독교 공간 끝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하나의 건물 안에 중심이 없는 균질한 이슬람의 공간과 중심이 명확한 기독교 공간이 공존하고 있으니, 코르도바 모스크는 두 종교적 믿음이 빚은 서로 다른 공간적 개념을 비교할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이다.
이슬람 건축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여행 때만 해도 코르도바 모스크는 건축가의 개성이 빛나는 특별한 예외라고 생각했다. 중심이 없는 건축 공간, 정면이 없는 건물 형태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기능인 모스크로 사용되지 못한지 500여년, 그동안 알지 못하는 변형과 왜곡의 역사 때문에 이런 이상한 형식의 공간으로 남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식을 위한 추정과 함께 코르도바의 충격은 잊혀져 갔었다. 그렇지만, 왜 어떤 이유로 이처럼 중심 없는 공간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설혹 그것이 극히 예외적이고 개별적인 사례라고 하더라도 이를 계획한 건축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몇 년 후에 한국 유네스코의 의뢰로 ‘세계의 건축문화 읽기’라는 교양물을 집필할 기회가 있었다. 동양권과 서구 뿐 아니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나아가 중동의 이슬람권 건축까지 일괄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교양서쯤이야” 하며 쉽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내가 알고 있는 건축문화란 기껏 한국을 포함한 중국문화권과 유럽건축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인도와 러시아의 건축에 대한 극히 초보적인 지식도, 몇 개의 대표적인 사례도 떠올릴 수 없었다. 더욱 절망한 것은 이슬람 건축에 대해서 무지하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오해와 편견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중동권은 물론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일부까지, 세계의 1/3이 이슬람 문화권이고, 세계건축의 1/3에 대해서 그때 것 관심조차도 없었다는 점을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이슬람건축에 대한 모든 자료를 구해보아도 열권의 책을 넘지 못했다. 한글로 된 저서는 물론, 번역서 한권, 논문 한편도 없었다. 영어권의 인터넷을 뒤져도 사정은 비슷했다. 열개가 채 안되는 관련 싸이트를 확인할 뿐이고, 거의 교양 리포트 수준의 내용 뿐 이었다. 그러나 몇 권 안되는 자료를 보더라도 코르도바의 의문은 쉽게 풀릴 수 있었다.
평면도만으로 본다면, 대개의 모스크는 코르도바의 것과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유사했다. 두껍게 둘려진 외벽, 좁은 입구, 전체의 반씩을 차지하는 안뜰과 실내, 균질한 열주열로 가득한 내부공간 등 코르도바의 형식이 그대로 반복된다. 이란 이스파한의 대모스크는 무려 600여칸의 단위공간으로 이루어졌고, 각 단위공간의 천장은 작은 하나의 돔으로 구성되었으니, 600여개의 개별적인 예배당들이 단순 집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건축이다. 이제 코르도바는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이슬람 건축의 일반적인 형식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면 이슬람 사원은 왜 이러한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의 의문을 풀어야한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추종자들을 극히 경계하면서, 자신은 모세와 예수와 같이 알라 최후의 선지자임을 주장했고 최후까지 인간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러한 교리의 배경에는 알라는 유일신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신이 될 수 없을뿐더러, 알라 앞에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신념이 깔려있다. 심지어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역할을 대행하는 사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알라의 말씀은 선지자 무하마드를 통해 기록된 쿠란에 적힌 그대로일 뿐, 이를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해석하여 설교하는 사제의 역할을 부정한 것이다. 또한, 인간이 알라와 만나려면 사제에 의해 대행되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슬람 사원에 이맘과 무에진이라는 성직자가 상주하기는 하지만, 이맘은 단지 예배를 인도하는 사회자의 역할이고, 무에진은 하루 다섯 차례 기도시간을 알리는 역할만을 담당한다.
무하마드는 알라를 말씀의 발신자이며 추상적이고도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무하마드 자신을 포함하여 인물이나 동물상의 대상을 우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쿠란마저도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성스러운 책일 뿐 예배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예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상징물들을 일절 금지시킨 것이다.
이슬람의 이런 근본 신앙은 특징적인 예배공간을 구성한다. 하루 다섯 번의 기도는 장소에 불문하고 정해진 시간만 지키면 된다. 평일에는 시간에 맞추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에서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지만,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다같이 모여 집단 기도를 드리기를 권고한다. 대형 모스크들은 이런 이유로 ‘금요 모스크’라 불리지만, 금요 모스크조차 개별적인 기도공간들을 단순 집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제를 위한 설교단도, 제단도 없으므로 중심공간이라 부를 대형공간도 필요치 않다. 모스크의 내부공간이 개인용 단위공간으로 잘게 분할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단지, 터어키의 모스크들은 예외적으로 중심 공간 통합적인 내부공간을 갖는다. 오스만 제국의 옛 영토에는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와 같은 십자형 모스크들이 건축되었는데, 그 모델은 바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사원이었다. 성 소피아사원은 원래 동로마 제국의 국교인 비잔틴 정교회의 대성당이었다. 비잔틴을 멸망시킨 터어키 족의 술탄들은 이스탄불의 모든 교회당들을 파괴하고 이슬람의 정통 모스크를 건설할 예정이었지만, 막상 성 소피아사원의 장대한 내부공간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애초의 생각을 바꾸었다. 오히려 기독교 성전인 소피아사원의 형식을 모든 터어키 모스크의 건축적 전형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따라서 중심에 대형공간을 두고 사방에 펜던티브 돔들을 연속적으로 배열한 독특한 터어키 모스크들은 기독교 공간을 이슬람사원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 역시 이슬람적 가치인 관용과 융통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슬람 교도가 되는 길은 매우 간단하다. “알라는 유일신이며 무하마드는 알라 최후의 선지자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라마단, 적선, 기도 등 5가지 의무 준수를 서약하면 신자가 된다. 이 간편한 입교의례는 이슬람교를 넓은 지역에 전파하고, 이교도들을 교화하기 위한 전략적 교리로 채택된 듯하다. 정복지역의 토착문화를 존중하며 활용하는 관례는 이슬람의 포교전략과도 맞아떨어지기 되며, 터어키 모스크의 특수성 역시 이 과정으로 설명된다.
동물과 인물상의 묘사를 금지했다고는 하지만, 건축의 장식적 표현 욕구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표현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남은 길이란 우상화의 우려가 전혀 없는 식물을 묘사하거나, 아예 추상화된 기하학적 문양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아라비안 상인들의 수학적 전통이 결합하여 복잡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발달하게 된다. 이슬람 건축은 마치 한 겹의 얇은 겉옷을 입듯이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진 장식의 층을 중요한 면에 덧씌우게 된다. 이 장식층은 돌, 나무, 벽돌 등 모든 재료의 건물에 공통으로 나타나며, 마치 정교하게 짜여진 직물이나 종이 공예와 같아서, 육중한 건물의 재료 속성을 제거해버린다. 이러한 건축과 장식의 추상화 경향은 이슬람 신앙의 말씀 중심성과도 일치하는 조형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무중심적 공간 구성, 균일 공간의 산재, 추상적 외형 등 건축의 속성은 도시적 차원에서도 다시 한번 발견된다. 오래된 이슬람도시인 모로코의 페즈는 전통적 도시형식에 익숙한 외부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이 도시에는 상징이 될 중심건축물이 없으며, 큰 광장도 없고 도로들의 위계도 없다. 인구 30만인 페즈의 모든 길들은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들이고 뚜렷한 질서체계도 없어서, 어느 것이 간선도로이고 지선도로인지 구분이 불가능하다. 길들의 넓이와 성격마저 주-부의 관계를 부정하고 균등한 것이다.
지배자의 궁궐이나 시청 등 권위건축물들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고, 성벽 도시 안에는 주거와 시장, 모스크와 학교 등 일반 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상적 건축물들만 가득하다. 그러나 주거건물은 물론, 다른 공공건물들도 두터운 담장이나 무덤덤한 외벽만으로 도시적 외관을 이루기 때문에, 건축적 경관이란 나타나지 않는다. ‘아라비안 나이트’ 가운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보면, 도적 두목이 복수를 위해 주인공의 집을 찾아가는 길의 모든 집 대문에 표식을 남기는 장면이 나온다. 부자 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바깥에서는 어떠한 차별을 읽을 수 없고, 심지어 모스크조차 좁은 골목길에 면하여 별다른 표식이 없기 때문에 주택과 모스크의 차별도 읽을 수 없다. 모든 도시 건축물들의 외관이 균질하기 때문에 표식을 남기지 않고는 길도 집도 찾기 어렵다.
믿음이 달라지면 건축과 도시가 달라진다. 다르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믿음의 원리를 건축이 따라가다 보니 결과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권 중심의 서구도시나, 왕권 중심의 동양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근본적인 속성들이 이슬람의 도시와 건축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어느 믿음이 진짜이고 어느 종교가 우월한지를 판별할 수 없듯이, 어느 건축이 진실이고 어느 도시적 방법이 나은 것인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한 노력이다.
이슬람 도시와 건축에서는 중심의 분산, 원심적 시각구조, 대상적 형태의 소거, 도시공간의 점유, 건축의 풍경화 등 현대건축에서 논의되고 있는 첨단 담론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슬람 건축이 서구나 동양의 건축에 비해 첨단적이고 현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종교가 믿음이듯, 건축적 패러다임들 역시 진위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