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이담을 비롯한 중국문화 전문가들은 중국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비종교성’을 꼽는다. 가장 종교적인 두 개의 문화전파 과정을 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로만 캐톨릭이 중국에 포교하기 위해서는 천주교로 둔갑하여야 했고, 막시즘이 전파되면 곧 마오저뚱사상으로 변환 수용되었다. d야훼는 단지 하늘의 주인일 뿐, 땅과 인간의 주인은 천자라는 의미의 천주교는 정통 교단에서 본다면 매우 비종교적이고 화형에 처할 이단교설이다. 농촌 민중조직과 영구혁명론을 요체로 하는 마오사상은 도시 프로레타리아 중심의 정통 막시즘과는 전혀 다른 사상을 보여준다. 캐톨릭과 막시즘이라는 강력한 종교마저 중국에서는 비종교적 내용으로 수용된다는 지적이다. 건축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전파되면서 불교건축 역시 전파되는데, 결과적으로 중국에 만들어진 불교건축은 인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을 창조하고 말았다. 인도의 스투파는 중국 전래의 망루형식에 흡수되어 파고다로 바뀌었으며, 챠이트야 형식의 사원은 중국 관청형식에 수용되어 사찰로 다시 태어났다.
중국과 비교한다면 – 적어도 해방 이후 진행되어온 문화현상만 본다면 – 한국문화의 특성은 철저한 ‘종교성’에 있다. 기독교가 마치 민족종교화 하면서 전통적인 유림과 불교의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으며, 반공주의는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 생존적 가치로까지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증산 수출 건설’을 국시로 삼았던 경제 우선주의는 배금주의와 개발 독재를 현재의 가치관으로 정착시켰다. 굳이 정치 경제 종교와 같이 거대한 부분에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81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었을 때, 전 국가적 역량을 올림픽 준비에 쏟을 것 같이 모든 분야에서 결의하였지만 올림픽 열기는 88년에만 반짝했고, 지금은 언제 열렸던가 망각 속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 문민정부 들어서는 ‘국제화 세계화’가 안되면 한해를 못넘길 것 같이 지식계를 들쑤시더니, 이제는 온 매스컴이 동원되어 인터넷 열풍을 확산시키고 있다. 인터넷의 정보 바다에 뛰어들기만 하면, 지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협박적인 과장에 전 국민을 몰아넣고 있다.
냄비처럼 쉽게 끓고 쉽게 식어버리는 광신적 종교성은 건축계에 더욱 두드러진다.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었을 때, 한국건축을 세계에 알리자는 말만 무성했을 뿐, 그 수많은 대형 시설물들을 건설하면서도 국제적인 건축 스타 한명을 만들지도, 특색있는 경기장 건물 하나 제대로 소개하지도 못했다. 서울 올림픽은 경기와 행사면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지만, 건축적인 면에서는 지극히 비경제적인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올림픽 이후 건축적인 자성과 비판은 커녕, 제대로된 건축적 평가서 한권 없이 지나간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린 사실이다.
세계화 국제화의 열풍에 맞추어 수십억을 들여 외국의 유명건축가와 학자들을 데려다 전시용 행사에는 열심이었지만, 영문으로된 한국건축 소개서 한권없이 세계를 정복하려는 건축계의 현실이 아닌가.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그건 토목계의 문제야” 라고 자족하다가,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후에야 부랴부랴 안전진단 특수에 휘말렸던 건축계라는 냄비. 사고 당시 그 수 많았던 전문가와 대책반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왜 책임있는 보고서 한권 발행되지 않는가? 그리고는 불과 일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성수대교와 삼풍아파트는 과거의 단순 실수가 되고 말았다.
이제 우리 사회의 커다란 냄비는 월드컵 유치로 다시 한 번 끓어 오르고 있다. 축구 행사에 불과한 월드컵 대회가 유치되지 않으면 국민경제는 파탄에 직면하고 정치는 끝장날 것 같이 가슴을 졸이게 하다가, 한일 공동유치란 매국노의 헛소리라고 매도하다가, 공동유치로 결정되자 원래부터의 공론이었던 것 같이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싸여있다. 이제 월드컵은 운동경기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와 문화이며 또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한때 천민자본의 표본이며 돈으로 권력을 사려했다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던 현대그룹은 국민적 재벌로 둔갑하였고, 그 그룹의 젊은 2세는 차차기 대권후보로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다.
월드컵 유치라는 사건은 어쩌면 올림픽 이상으로 건축계가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준비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자. 한국건축이 세계무대에 데뷰할 수 있었던, 그러나 이미 놓쳐버린 기회들을 아쉬워할 수 만은 없다. 기회는 언제고 또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절호의 기회를 무기력하게 놓쳐 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건축계 전반의 ‘조기 망각증’에 있다. 건축계의 냄비 현상을 방치한다면, 월드컵 열기는 올 여름을 넘기면서 시들해 질 것이고 2001년 쯤에야 급조된 국제건축전을 개최한다, 유명건축가를 초청한다, 한국적인 건축을 세계에 선보여야 한다 부산을 떨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이 기횐데, 지나가고 있다”고 자탄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적지 않은 기회, 그것도 세계적인 기회가 남아있다. 월드컵이 그렇고, 당장 닥쳐올 ASEM 회의가 그것이며, 남북통일이라는 전 지구적인 사건도 기다리고 있다. 지방은 지방대로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2년마다 열릴 광주 비엔날레, 춘천과 의왕의 연극영화제…… 수많은 커다란 행사들이 줄지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건축계가 적극 참여하여 이들 국제적인 이벤트를 주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없다. 월드컵도 경기장 몇 개 설계하는 것으로 – 그것도 관료들의 주도로 진부한 경기장들을 양산해 내는 것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망각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월드컵 다음에도 또 다른 기회가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월드컵 유치로 끓어오른 우리 사회의 열기가 -적어도 건축계 만은- 식지 않아야 한다. 남은 6년, 단순히 하나의 스포츠 이벤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건축의 비약을 위해서 끊임없이 준비하고 실험해야 할 것이다. 물론 건축인 개인의 노력들이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선도적 임무는 건축가협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유명 건축가를 초청해도 좋고, 월드컵용 비엔날레를 열어도 좋고, 월드컵 시설을 국제현상에 부쳐도 좋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장기적인 계획과 식지 않는 열기가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제적인 행사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를 국내 건축 수준의 질적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고, 우리에게도 세계적인 건축가가 몇 명 출현할 기회로 삼아야한다는 점이다. 그 모든 기획과 실행의 책무가 건축가협회에 달려있다. 월드컵을 또 하나의 종교적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건축적인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