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4.06.20.
출처
건축과 환경
분류
건축론

Indivisual Theory and Architecture of New Generation

1. 여기 9명의 건축가들이 있다. 이들은 1994년 현재 30대의 연령에 있다는 것 외에 다른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이들이 과거 걸어왔던 학습과 수련의 과정은 물론 현재 보여주는 작업의 경향 뿐 아니라, 이제 막 시작의 시점에서 앞으로 변화되고 성숙해질 방향과 가능성은 누구도 점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예술가들도 자신이 어느 하나의 유파나 유형으로 분류되기를 원치 않는다. 자신의 예술을 특정한 틀로 고정하는 순간, 창조성과 새로움이라는 근대예술의 생명을 잃어 버리기 때문이다. 더우기 80년대 이후를 풍미하는 이른바 “탈- Post-”의 경향들은 공통성 보다는 개별성을, 양식보다는 차연을, 전체보다는 부분을 사고와 이론적 전개와 삶의 기본 전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성과 차별화의 전략에 익숙한 이들을 범주화하고 유형화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30대의 신진건축가라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를 이들은 거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건축적 사고와 작품을 비평해야 한다면 그 목적과 방법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길게는 10년의 경력을 가진 작가도 있지만, 대부분 독립사무실을 운영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지 1-2년의 짧은 연륜과 그에 따라 1-2 작품, 심지어는 학교시절의 작품을 대상으로 비평을 하는 목적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살펴보는데 있지 않다. 이들이 축적한 결과보다는 앞으로의 전개 방향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연령과 연륜이 갖는 속성 뿐 아니라, 이들의 건축에 대한 태도와 사고가 한국건축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고 21세기는 이들의 주무대가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평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또한 지나간 작품들을 통해 한개인을 혹은 집단을 무어라고 규정하고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언술과 작품의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작가의 사고와 태도를 점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작가에 대한 비평이 될 것이다. 이들의 성장배경과 작품 경향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고찰이 필수적이지만, 이번 특집의 목적상 개별건축가에 무게중심을 둘 수만도 없다. 한국건축계의 역사적 인적 구조상 싫던 좋던 이들은 이미 집단화되어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은 개별 건축가의 개성과 함께 집단적인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점검해 볼 수 밖에 없다.

2. 연령상으로 가장 위에 해당하는 김관석은 매우 특이한 -한국적인 상황에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2년간 울산공대의 전임교수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건축사상을 탐구하는 학자의 길에 매진해 있던 그는 홀연히 대학에 사표를 던지고 프로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실적 기준에서 보면 잘나가던 보장된 길을 거부하고 진흙탕 속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이후 AA에서의 수학과 미국에서의 경험 후 귀국하여 아르텍을 열었다.
발표된 몇개의 근린생활시설들은 표면에 씌워진 강렬한 색채의 조합으로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색채 자체를 또 하나의 피막으로 레이어링화하려는 시도는 고만고만한 근린상가로 구성된 평범한 거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차별화시키기에 충분한 무기였다. 이러한 차별화 전략은 상업적 성공을 보장하는 것에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부적 수법 보다는 작가가 즐겨 쓰는 공간의 조직 수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구의동 주택안에서 잘 보여지듯이 규칙적인 기본틀 안에서 비틀어진 계단과 경사벽들을 삽입함으로써, 또 모더니즘적 수법의 기조 위에 하이테크적인 요소들을 삽입함으로써 안정과 변화, 통일과 다양성을 동시에 꾀하고 있다. 건축적 원론과 현재적 취향을 무리없이 섞어보려는 노력이 외부로 나타날 때는 색채의 레이어링으로 선택된다. 그에게 있어서 포스트 모던과 하이테크와 디컨스트럭션이 창출해 낸 어휘들은 한낱 건축의 요소로 차용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리버럴이지만 결코 니힐리스트는 아니다. 그의 작품 전반의 기본을 모더니즘의 교의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잇단 사조들의 발명품들은 얼마든지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는 악세서리가 된다. 천성빌딩 옥상의 철골구조물, 구의동 주택의 파이프 가새 들은 구조적 필연이나, 이론적 정당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일개 장식으로서, 그러나 매우 강조되는 이미테이션 귀걸이와 같은 장식으로 자리매김된다.
월악산 국립공원 선착장과 한국신학 연구소, 천관사 등 자연에 위치한 프로젝트들은 작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그의 도시건축물 보다 더욱 많은 가능성을 발견케하는 부류이다. 박스, 피라밋, 원통 들의 단순한 조형들이 집합되고 혼합되면서 자연환경과 일체를 이루려는 의도는 한학에 정통하고 한국건축연구에 심취했던 교단생활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규칙적인 구성틀 속에서 어긋나고 비틀린 부분과 요소들은 전통건축의 집합적 성격이 재해석된 결과로 비쳐진다. 천관사는 건축가가 본격적으로 개입된 현대불교사찰로서 프로젝트의 성격부터 이례적이다. 경사지의 해석, 어긋난 건물들의 배열, 승방과 법당의 기능 배분 등이 전통적인 사찰건축의 맥을 잇고있다. 반면 개개 건물들은 단순한 박스에 원 정사각형 정삼각형 등의 개구부가 예의 이중성을 병치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배치의 개념이 너무나 인습적이어서 개별 건물의 현란함 조차 한계 속의 기교로 비춰지는 점이다.

3. 김준성은 브라질과 뉴욕 플랫에서 대학을 마친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교육적 경력의 화려함과 함께 마이어, 알바로 시자, 스티븐 홀 등 대가급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근무한 화려함을 더한다. 80년대 말에 귀국하여 디컨스트럭션 전시회를 주관하여 주목을 받았고, 이후 독립된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90년대 들어 교육과 작품활동에 열중하여 이미 11개의 주목할만한 작품을 발표하였고, 현재 경기대학교 대우교수이자 디자인 디렉터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형이상학적 삶의 편린들이 엄격한 자기절제를 통해 수용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아직까지는 대표작으로 평가될 비승대성당은 땅 속에 함몰된 곡선의 벽들로 이루어진 무형의 형체 속에 빛의 대화를 추상화하였다. 여기에는 종교건축 고유의 빛과 어두움, 공허, 추상들이 내부화 됨은 물론, 외부에서는 갈라진 땅의 틈바구니 속에서 솟아나오는 휘어진 빛들은 비행장의 유도등과 같이 신의 강림과 인간의 안착을 표현한다. 빛이라는 주제를 내부 뿐 아니라 외부화시킨 점에서, 대지와 구조물의 처절한 일체화에서 무척 신선한 엄숙함을 느끼게한다. 작가의 해석학적 지식과 함께 깊은 사색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을 것이다. 지표의 융기와 균열이라는 독특한 주제는 광명시 주택계획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지를 정지하는 레벨링 자체가 이미 반이상의 건축인 것이다. 역삼동 주택은 단순한 박스 속에 두개의 곡선을 삽입시켜서, 무표정한 외관과는 달리 다양한 시적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그가 의도한 폐쇄된 하늘의 빛이 그려내는 하루의 흔적을 담으려는 의도는 매우 철학적인 주제로 주택은 더이상 일상적 삶만을 수용하는 기계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내부공간에 대한 작가의 능력은 오사카아파트 개조안에서도 확인된다. 휘어진 내부의 벽 하나로서 내부공간을 재구성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의 일련의 작품에 등장하는 곡선의 벽들은 스케치에 의한 자유곡선이 아니라 엄격한 도학적 실험을 통해 얻어진 기하학적 필연성의 결과이다. 이러한 자기 절제와 표현의 양면성은 알바로 시자나 루이스 바라간의 무표정한 그러나 강렬한 벽들을 대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들이 갖는 형이상학은 신진세대 답지 않은 무게와 정통성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일면 지나친 추상성 관념성이 닫혀진 세계의 은밀함으로 건축을 가두어버리는 경향이 감지된다. 성당은 신부와 신도만이 아닌 지역사회 전체의 소유이며, 주택 역시 작가의 것만은 아니다. 그의 내부공간에 대한 관심과 능력 때문에 주어진 대지 내부에만 건축적 역학이 작용하게 된다. 그의 드로잉에는 외부세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도시나 자연 환경 속의 대지를 마치 고립된 헬기 착륙장과 같이 취급하고 있다. 외부와 관계를 거부하는 균열 속에 들어있는 건축은 궁극적으로 비극적 세계관의 표상이다. 현실은 물론 비극적이지만 그 속에서의 건축이란 감추어진 보석이 아니라,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발광체여야 할 것이다.

4. 개별성의 시대에 메타의 이종호와 양남철이 보여주는 팀웍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공동 스튜디오를 개설한 89년 이래 5년간 서로의 신뢰와 양보의 미덕은 곧바로 작품으로 연결된다. 한두살 차이로 메타의 얼굴이 된 이종호는 9명의 건축가 중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 졸업, 곧바로 공간사에 들어가 자칭타칭 김수근선생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그의 단순한 이력은 대부분의 선배 건축가들이 걸었던 길이었지만, 30대 신진세력 가운데는 오히려 특이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종호는 9명의 건축가 가운데 유일하게 해외수학을 겪지 않은 순수 국내파이다. 반면 양남철은 이종호의 이력에 미국 로드아일랜드 대학 유학의 이력이 첨가된다. 거장 김수근의 죽음 이후에 공간사의 주축 멤버들은 각자의 사무실을 운영하기 시작하여 90년대 주도적인 집단으로 성장했다. 김원석 오기수 등 원로층은 말할 것도 없이 류춘수 승효상 등의 뛰어난 활약은 김수근의 가장 중요한 업적일 것이다. 그 막내로서 메타가 자리잡고 있다.
이종호와 양남철은 이력 뿐 아니라 건축적 사고에서도 특이한 그룹이다. 이들은 “모던은 아직 유효하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에는 정통파로서의 자신감이 배어있다. 모더니즘의 교훈 위에 문화의 기억을 연속시키고, 고전을 재해석하여 우리의 언어를 회복하고, 종합적 사고방식으로 전환하자. 그리고 건축가는 이 시대를 새롭게 인식하고 건축의 역할을 재정의할 책임이 있다고 다짐한다. 역사를 회복하고 사회를 치유하자는 모더니즘의 윤리를 이미 낡은 패러다임으로 치부하며, 거대 이론의 환상으로 폐기하려는 신세대 가운데 보기 드문 전체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회에 대한 애정은 일련의 시골교회 시리즈에서 증명된다. 춘천 홍천 신포 율전의 4교회는 이들에게 건축가협회상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수준 이하의 작품에도 남발한 상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영광이 아니다. 오히려 오랫만에 가치있는 수상작을 결정한 협회상의 영광일 것이다 – 기존 건축계의 상업주의와 유행주의에 충격을 주었던 작품들이다. 어린 시절 따스했던 정미소의 기억, 블럭과 나무판자라는 하찮은 재료의 새로운 발견을 기초로 형상화된 이들 교회들은 농촌지역 낮은 곳에 임하는 대중신학을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작가들의 따스한 세계관과 감각 외에도 이 교회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기존 환경질서를 존중하는 집합적 자세이다. 기존의 목회관과 예배당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구성, 넓은 대지와 관계를 맺으려는 담장의 설정 등. 얼핏보기에는 단순함과 담백함 만이 느껴질 수 있지만, 작가들의 치밀한 계산은 영역화와 질서 재편의 장치를 드러내지 않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상징탑에 반영된 기술적 조형은 다른 프로젝트인 ‘카사 델라 비타’의 기술 지향적 표현의 축소물이다.
필자는 다른 비평에서 이시대 건축의 주제는 “도시와 기술”로 귀결된다고 언급한 적이있다. “도시”란 다름아닌 부분과 부분 그리고 전체와의 집합적 관계이고, “기술”이란 전자 비철금속 시대의 건축적 사회적 원동력을 표현하려는 시대정신이다. 스튜디오 메타의 작업에 호의를 느끼는 이유는 바로 도시와 기술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공 중인 바른손센터를 주목한다. 지상층의 개방된 플라자를 설치하고 가로면에 고려된 경쾌한 피막에 구멍을 뚫어 옥상부의 조형물을 도시에 제공하려는 의도는, 의도 자체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이미 발표된 설민빌딩에서도 실험한 내용이지만, 바른손센터에서는 한층 세련된 감각으로 정제되어 있다. 피막의 재료선택과 디테일은 아직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기술 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록 중소 자본의 상업건축이지만 도시를 포용하고 기술 표현의 수단으로 공공성을 높이는 것이 기업 이미지를 향상시켜 궁극적으로 자본에 이윤을 더해주는 포지티브 섬 게임을 구현한다.
농촌과 대도시라는 상반된 대지의 환경 속에서 각각 적합한 관계의 방법을 실현하고 있는 메타의 작업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건축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특히 농촌교회 시리즈에서 읽혀지듯 이들의 연속된 실험과정이 자칫하면 하나의 프로토 타입을 구축하는 것으로 만족할 우려가 있다. 도시건축에서도 이러한 징후는 엿보인다. 사회적 책임의 무게를 느꼈던 모더니스트들이 흔히 빠지기 쉬웠던 획일성의 함정은 그들이 주장했던 아방가르드와 상반된 결과를 빚었다. 메타의 정신이 모더니즘의 윤리에 놓여져 있다하더라도 원리를 구축하고 보편화를 추구하는 데에만 전력하기에는 아직 이들의 앞날은 너무나 길게 열려있다.

5. 김흥수는 9명 건축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독립 스튜디오 경력을 갖고있다. 건축동인 모람의 창립멤버로 구성원의 잦은 교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위치를 지키고 있다.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김원의 광장건축에서 수련하고 김종성의 서울건축 중동프로젝트로 해외 경험을 쌓았다. 83년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 발표한 수원의 동인주택 시리즈는 언론의 각광을 받은 바 있다. 80년대말 3년간의 미국 미시간대학 유학과 LA의 사무소 경험을 쌓은 후 귀국하여 정력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최근 그는 자신의 건축관을 피력하는 강연에서 대지와의 관계와 프로그램의 해석을 건축의 본질로 이야기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빛과 공간, 상상력과 창조력을 건축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매우 기본적인 언술이지만, 현란한 이론과 직수입된 지식들이 난무하는 90년대에 오히려 돋보이는 침착한 깨달음이다. 대지의 해석과 프로그램의 지시를 중요시하는 건축관은 작품마다 차별화될 수 밖에 없는 다양성의 결과를 야기한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 고유의 이론과 어휘보다는 합리적인 해결책들이 우선한다. 초기의 동인주택부터 보여졌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새로운 집합의 방법들은 기능의 재해석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그간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중소형의 단독주택과 근린생활시설들이었고, 그들 각각이 다양한 형식을 추구했던 원인도 예의 건축관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 발표한 자명당과 향린동산 집합주거 계획안은 논리적인 구성, 참신한 아이디어와 함께 시적 감수성의 장면들을 가지고 있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흔히 붙여지는 “머리좋은 건축”이란 칭호는 논리와 깜짝 아이디어로만 점철된 자기과시적 건축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조소이다. 펼쳐지는 산들의 전망 속에서 날개를 단듯 펼쳐지는 건물의 서정성, 의도적으로 길게 늘어 뜨린 어프로치 등은 그가 주장한 기능과 대지의 해석을 뛰어넘은 창조적 상상력의 결실이다.
최근 그는 대전시청사 현상안과 청주종합터미날 계획안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한 바 있다. 대전시청사에서는 도시적 시설물의 배열과 시민 동선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도시적 건축의 축을 설정하고 기능들을 배열하였다. 의회는 원통으로 강당은 사각상자로 형태화되고 행정업무는 고전적 타워로 상징화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대지의 상황을 도시적 위상으로 환원하였고, 시청사의 복합적인 기능군을 각각의 고유한 조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대지와 기능의 해석은 청주 종합터미날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었다. 이 두 프로젝트의 성격이 대형 도시복합시설이라는 점을, 그리고 현상공모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양해할 수도 있는 결점이겠지만, 합리적인 해석과 조형이 다이어그램이 곧바로 건축으로 전환된 느낌이 강하다. 기능의 표출은 매우 직설적으로 형태화 했으며, 도시 축의 설정이 어떠한 변환없이 내부 가로로 바뀌었고, 도시적 상징이란 4면 대칭의 단순한 타워로 형상화되었다. 합리적인 사고가 시적 변환이나 감각적 표출을 결여한다면 지루하고 압도적인 공간과 형태의 결과를 만들기 쉽다. 극단적인 예지만 유럽의 합리주의 건축이 인간성을 결여했을 때 파시즘의 효과적인 매체가 되었음을 상기해야한다. 건물의 규모가 크든 작든, 도시적이든 자연적이든 간에 김흥수의 주택들에서 보여주었던 많은 긍정적 요소들은 변함없이 재구성되어야할 것이다.

6. 귀국 후 정림건축에서 활동하다가 최근 독립한 조병수는 철저하게 미국에서 성장하고 수련한 건축가이다. 몬타나 주립대학을 거쳐 하바드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여러군데 현지 사무소들에서 실무경험을 쌓았다. 92년 귀국하여 입사한 정림건축에서는 자신의 주도로 분당의 할렐루야교회 (노아의 방주)를 설계하였다.
최근 독립하여 아직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을 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림시절의 노아의 방주와 미국에서의 두 계획안을 통해 이 작가가 가진 가능성의 편린을 추적할 수 밖에 없다. 그의 건축이 추구하는 것은 제 요소들의 관계성이라고 말한다. 관계성의 범주는 비단 건축적 요소들 뿐 아니라 문화 기억과 인식의 시간적 요소들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것이다. 미국에서 작성된 두개의 프로젝트는 그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담고있다. ‘완벽한 혼돈’은 도시설계적 프로젝트이다. 근대사회구조의 모순을 풍자하는 연극의 내용에 걸맞게, 근대 합리주의 도시계획이 빚어놓은 비인간적 도시환경을 비판하고, 공공시설과 시민과의 관계성을 재구축하려는 시도이다. 기존의 건물들은 연극의 배경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기존건물 사이의 틈새를 이용하여 새로운 공공공간을 조성하기도 한다. 기존의 비인간적인 도시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전혀 다른 장소로 바꾸어버리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도시건축적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반가움을 금할 수 없다. 동시대의 건축가들이 자칫하면 공룡화된 자본의 횡포와 도시행정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고 체념하는 현상을 흔히 목격하기 때문이다. 도시환경을 재구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쩌면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더욱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건축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도시를 이루는데 있다. 보석과 같은 점적인 건축만으로 빛나는 도시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에 비록 주어진 대지 내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들이지만 도시적인 관심은 끊임없이 개발되어야 할 과제이다.
‘루가노시 발전사 기념관’ 계획은 호수라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점에서 보스톤의 계획안과는 다르지만, 역시 호수라는 자연환경의 미적 체험을 재구성함으로써 시민들과의 관계성을 회복시키려는 점에서는 동일한 주제일 것이다. 우선 그의 이력만을 가지고 볼 때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미국적 방법론의 냄새를 여기서는 전혀 맡을 수 없다. 오히려 티치노와 북부 이탈리아의 신합리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읽는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합리주의 건축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에 가슴이 부푼다. 기념관은 지하에 형성되고 지상에는 가벽과 계단으로 구성된 장소가 놓여진다. 물론 기존의 극장과 도시 조직, 그리고 호수의 관계를 분석한 정당한 설정이다. 그러나 정당한 개념이 정당한 건축으로 구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관계성을 위한 건축은 건축 자체가 강조되기 보다는 그것에 담기는 소프트 웨어가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루가노의 계획안은 조각적으로 집합된 가벽과 계단이라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채용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장소이기 보다는 오브제로서 성격을 갖는다. 작가가 의도한 몇개의 뷰포인트는 정지시점에서 나타나는 투시도적 경관만을 얻을 것이다. 관계성 회복은 더욱 역동적이고 체험적인 장소에서 가능한 것은 아닐까.
‘노아의 방주’의 성과와 한계 전부가 건축가 조병수 자신에게 귀속되는 지는 의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우선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10,000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교회. 500억원의 막대한 공사비가 투여되는 종교시설. 메가 스트럭쳐의 한계를 인공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이 도시환경이 아닌 자연 속에 놓여질 때는 더욱 그러하다. 교육시설들은 지하에 묻히고 주예배당이 거대하고 유니크한 매스로 돌출된 설정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다양한 단위공간들로 쪼개질 교육시설들은 환경적인 문제에 봉착할 것이고, 커다란 단일 예배공간은 바깥의 자연과는 고립된 채 완벽한 인공공간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관계란 대지의 경사도에 순응한 레벨링 정도이다. 물론 작가가 주제로 삼은 것은 교회 내부에 떨어지는 강력한 십자형의 빛이다. 하루의 궤적과 일년의 시간적 흔적을 내부에 연출하는 빛. 그러나 좋은 건축이란 가능한 모든 가치를 만족시키는 건축이라 믿는다.

7. 김홍일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빠리8대학과 10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귀국하여 최근 스튜디오를 개설하였다. 미국으로 집중되었던 유학지의 분포가 최근 일본과 유럽으로 확산된 현상은 무척 다행스럽다. 세계건축의 다양한 방법들을 체험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특히 현대 프랑스 건축의 다양한 가능성들은 상업주의 건축에 휩쓸린 미국의 메이저 건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론과 실현의 결정체이다. 그만큼 프랑스에서 수학하고 수련한 건축가들에게 큰 기대를 모으게 된다.
김홍일이 사무실을 개설한 지는 채 일년이 못된다. 이번에 소개된 두 작품도 그의 빠리시절 작성된 계획안들이다. 따라서 과거의 제한된 작업들만으로 건축가 김홍일의 한계와 가능성을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일련의 강연을 통해 발표된 “건축의 시”라는 담론에 주목하자. 우선 그는 현대는 근대건축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규정한다. 꼬르뷔제의 업적과 같이 이성적인 건축구법과 시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건축을 추구한다. 더 나아가 그 속에서 한국적 전통을 현대화하고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투사와 같이 헌신하자. 그에게 꼬르뷔제는 건축의 교과서이며 램 쿨하스는 건축의 참고서이다. 일견 매우 상식적인 담론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분명 확신에 찬 모더니스트의 자기 고백이다. 한국의 주도적인 건축가들 사이에서 이미 모더니즘은 고전으로 자리잡은 경향이 뚜렷하다. 여기에는 몇몇 이론가들의 공헌도 컸지만, 주로 국내파들인 기성 건축가들이 난무하는 현대 건축이론의 홍수 속에서 자기 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전술의 측면도 강하다. 그러나 디컨스트럭션의 본 고장에서 오랜기간 수학한 김홍일의 담론이 본인에게 진실된 것이라면, 국내 건축가들의 방향설정은 한층 힘을 더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하기 쉬운 함정이 있다. 김홍일을 비롯한 많은 건축가들이 강조하는 꼬르뷔제는 이제 건축 그 자체가 되었다. 팝 아키텍트든 디컨스트력셔니스트든 신합리주의자든 간에 어느 누구도 꼬르뷔제의 이론과 실현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모두 꼬르뷔제의 적손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꼬르뷔제를 계승하자는 선언은 올바른 건축을 하자는 너무나 당연한 다짐이 된다. 꼬르뷔제는 수많은 근대의 거장 가운데 한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담론은 꼬르뷔제 이후의 다양한 갈래 가운데 하나를 확실히 선택하든가, 새로운 꼬르뷔제 건축을 확립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반세기 전의 꼬르뷔제가 아니라 오늘날의 꼬르뷔제이다.
빠리한국문화원 계획안과 J 기념관 계획안은 그의 디스코스처럼 꼬르뷔제의 실험에 충실하고 있다. 꼬르뷔제 빌라의 삐로띠들은 떠있는 매스와 독립된 유선형 매스로 치환되었다. 아래 위 매스 사이의 투명한 홀은 과감한 시도와는 달리 매우 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분리된 기둥과 벽들, 벽에 틈만들기, 여러가지 요소들이 모더니즘의 어휘들을 세심하게 실험하고 있다. 한가지 지상부에 설정된 개방된 대형계단이 이채로와 보인다. 집단화의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프랑스식 상징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 두 프로젝트만을 통해 건축가 김홍일을 점검하는 일은 유보하기로 한다. 이 작품들은 수련작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며 그의 개성이 크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견고한 모더니스트로서의 확신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본격적인 그의 작품을 기대한다. 모더니즘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대안이라든가 아니면 가장 정당한 이념이기 때문은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 속에서 꾸준히 작업하는 건축가가 우리 사회에 너무나 드물기 때문이며, 서정적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실험하여 그 허실을 명백히 밝혀줄 작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8. 최근 대학의 강단과 건축계의 토론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김종규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후, 런던 AA스쿨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정식으로 졸업한 유일한 한국인으로 기록된다. 적지 않은 건축인들이 AA스쿨을 다녀 왔지만 단기간의 수학에 그쳤다. 그곳의 전위적인 분위기나 비싼 학비와 물가가 다년간의 수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대로 최근 AA는 램 쿨하스와 자하 하디드의 본거지이다. 그들 스스로 디컨스트럭션의 발상지라고 자부할 만큼 디컨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현재 이 학교의 주도권을 잡고있는 제프리 킾니스 일파는 “이제 디컨스트럭션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디포메이션이다.” 라고 선언해 당혹케 한다. 어쨌든 AA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김종규를 디컨스트력셔니스트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대다수 AA의 학생들과 같이 기존의 상식을 해체하고 이론을 의심하고 새로운 정신을 실험하는 전위의 정신을 배웠을 뿐 디컨스트럭션 자체를 배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AA를 졸업하고 런던의 파트너들과 수년간 작업한 결과를 놓고 본다면, 또 93년 귀국 후 자신의 스튜디오 작업을 본다면 어느 특정 유파로 유형화 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그만큼 그는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유럽의 건축을 이론과 사조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건축 실천의 레퍼런스로 받아 들인 것이다.
런던 시절의 빠리 일본문화원 현상안과 나라 컨벤션홀 현상안, 그리고 귀국 후의 스프린젤 도시설계 현상안에서 도시를 보는 그의 안목과 도시 속 건축이 가져야 할 가치를 잘 읽을 수 있다. 빠리의 계획안에는 휘어진 가로와 주변의 기존 대지들의 형상들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고 있다. 기존의 도시 질서를 존중하고 새로운 수직 가로를 통해 건물로 진입케하는 설정과 좁고 긴 대지들의 형상을 내부화한 구성은 이론의 강변없이도 매우 정당한 해결들이다. 국제 현상에서 10위권에 입상함으로써 잔잔한 충격을 주었던 나라 컨벤션홀은 컨벤션홀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통쾌하게 허물어 버렸다. 삼각형의 넓은 대지 전체를 건축화함으로써 교류와 정보전달이라는 컨벤션의 기능을 확장시켰다. 이 계획안에서 돋보이는 것은 경사진 바닥면 전부를 정보와 통신의 미디어로 설정한 점이다. 아울러 포스트의 조합으로 가변적인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그의 관심이 도시 뿐 아니라 새로운 구조와 기술, 소재, 정보통신 등에 까지 펼쳐져 있음을 보여준다. 빠리의 계획안에서도 가로에 면한 피막을 유리벽들을 겹쳐 투명 -반투명- 불투명의 벽으로 구성한 것은 유리라는 진부한 소재의 새로운 실험이다.
아이디얼한 런던에서의 작품들과는 달리 귀국 후에는 현실적인 벽들과 싸워야했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는 성공회 성심원 교회가 진행 중이다. 자연 속에 설정된 인공의 대지. 그위에 침묵하고 있는 박스와 그리드들. 일체의 기교없이 단지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멍들만 존재한다. 차겁고 근엄한 형태는 일련의 계획안들과는 너무도 판이하다. 이 작품이 새로운 실험인지 아니면 현실과의 타협인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는지는 앞으로 몇개의 작품이 더 진행된 후에야 명확해 질 것이다. 런던 시절 보여주었던 도시건축적 안목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능력을 계속 발전시키고 현실화시키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평가를 보류하기로 하자.

9. 9명의 건축가 가운데 최연소인 최욱 역시 예사롭지 않은 이력의 신인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후 이딸리아 여행을 시작한다. 누구의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시절, 우연히 들른 비쩬짜의 도시와 건축에 매료되어 주저앉았다. 그 감동의 주인공이 팔라디오라는 사실을 알고 그곳의 팔라디오 건축학교에 입학, 그리고 베네찌아 건축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이딸리아에 있는 동안 아이젠만의 혹독한 웍샵에 참여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한 것도 커다란 수확이었다 한다. 귀국 후 장건축에서 실무를 익히다가 최근 독립 스튜디오를 열었다.
최욱은 올해 봄에 사무소 K&C를 열었다. 그 역시 실현된 작품은 물론 없고 발표된 것으로는 진행 중인 광화문 샬롬교회 뿐이다. 그가 베네찌아 대학에서 주제로 삼은 것이 꼬르뷔제의 빌라 가르쉐 분석이었다. 하나의 건축을 분석하고 변형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매우 효과적인 교육을 스스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씨의 건축과 이론 역시 떼라니의 이딸리아 합리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며 그 근원은 역시 꼬르뷔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울산대학교의 초청강연회에서 보여준 그의 학습과정과 유럽의 근대건축과 이딸리아 건축에 대한 이해는 매우 성실하고 정확한 것이어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샬롬교회 계획안에는 이러한 자기훈련을 통해 얻어진 건축요소들의 확실한 정의와 그들간의 구성이 나타나있다. 또한 그가 이해하고 있는 떼라니의 엄격함과 로씨의 역사적인 유추들이 분해된 벽과 개구부, 반복된 열주에서 엿보인다. 그러나 분석적 훈련을 통해 얻어진 요소들의 조합이 그다지 성공적으로 재구성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제시된 모형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매스들과 벽들, 그리고 여러 요소들이 통일된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개체화되어 있다.
이론의 과정과 실현의 과정이 아직은 일체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분열은 이번 특집에 기고된 그의 언술에서도 나타난다. 거대 자본주의에 대한 체념과 파편의 기억들. 무라까미 하루끼의 가벼움과 설명 모호한 건축에의 동경 등은 팔라디오와 꼬르뷔제와 로씨의 가르침과는 매우 상이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의 언술이 패러독스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라면, 예의 초청강연에서 그 스스로 비판했듯이 정신은 사라져 버린 껍데기 모더니즘의 바이러스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가 학습한 팔라디오의 기하학적 원리와 변용, 꼬르뷔제의 변혁 이론과 로씨의 역사적 태도는 너무나 귀중한 교훈들이며, 서양건축의 진수 가운데 진수이다. 그들 모두의 이론과 건축은 단편적인 사고와 사회에 대한 체념에서 형성된 것이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사회와 시대를 투시하는 전체적인 안목과 끊임없는 애정이 자리잡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10.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상의 개별적 비평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애초부터 출발점에 선 건축가를 비평한다는 행위는 한계와 오류를 가길 수 밖에 없다. 아울러 필자의 비평 가운데 긍정적인 부분은 대상 건축가들의 생각을 꿰뚫은 것이기를, 그리고 부정적인 부분은 그들의 생각과는 어긋난 필자의 단순한 우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만 더욱 밝은 희망의 미래를 점칠 수 있기 때문이다.
9명의 건축가들이 동세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능력있고 개성적인 더욱 많은 신진건축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같은 지면에 초청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 미국과 유럽 각국과 일본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30대 건축가들도 많이 있다. 그만큼 인적 자원의 폭이 넓고 두터워진 것이다. 이들에 모두에 대한 소개와 평가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지만,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본격적인 집단적 비평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 9명의 신진 건축가들에 대한 집단적인 비평은 개별비평의 합집합으로 갈음하겠다. 그들이 가진 능력과 탄탄한 지식체계와 순수한 열정이 무한한 가능성을 담보해 주기 때문에 많은 우려를 불식할 것으로 믿는다.